열 여덟 번째 조각
남아공에 살던 시절, 나는 한 아이를 기르는 것만으로도 한계에 다다르곤 했다. 유사시에 기댈 수 있는 친정은 이역만리 먼 곳에 있었고, 교육 및 의료, 행정 시스템은 너무나 낯설어 적대적으로까지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렇게 하나의 아이와 씨름하던 내게 네 아이의 엄마인 친구가 생겼다. 한 때는 피아니스트를 꿈꿨고, 피아노로 석사까지 했지만 지금은 네 아이에게 치여 사는 친구였다.
가끔 친구네 집에 놀러가보면, 친구는 항상 끊임없는 일을 해치우고 있었다. 자신은 다녀본 적도 없는 남아공 학교의 알 수 없는 숙제들을 챙겨줘야 했고, 아이들이 다니는 각기 다른 학교로 운전해 등하교도 시켜야 했다. 음악이나 체육같은 방과후 과외활동까지 싣고 다니는 건 물론이요, 그 짬짬히 장도봐야 했다. 간신히 집에 돌아오면 그야말로 산더미 같은 빨래가 반겨주고, 네 아이는 배고프다며 돌림노래를 불러댄다. 게다가 왜 식성은 다 제각각인지. 그리고 왜 이렇게 시끄러운지. 친구네 집에 놀러가면 한 명의 아이를 기르는 데 익숙한 나는 내 딸이 가세한 다섯 명의 아이들이 내는 소란으로 인해 정신줄을 놓쳐 말을 이어가기 힘들 정도였다. 이 모든 일을 감당하고 있는 친구를 보며 왜 그렇게 빼짝 말랐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곤 했다.
그런데 정작 내 친구를 괴롭힌 것은 네 명의 아이를 기르는데서 기인한 고단함이 아니었다. 정말 친구가 힘든 건, 음악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예술하는 친구들은 보는 세상이 다르다는 걸 가끔 느낄 때가 있었다. 석사 시절, 룸메는 조소전공하는 친구였다. 예원, 예고를 거쳐 미대에 온, 평생을 미술과 함께한 친구였는데 놀라운건 그녀의 눈이었다. 당시 내가 입고 있던 보라색 스웨터를 보고서는 초록색, 무슨색, 무슨색이 섞여 있다는거다. 나는 “장난하나 이건 보라색인데.”라고 의심했지만, 훈련받은 그녀의 눈에는 그 스웨터 속 색실들이 가진 각기의 색이 보인다는거였다. 마침 옆에 또다른 미술전공자 후배가 있어서 “내 스웨터에 무슨 색이 보여?”라고 물어보니 “색이 몇 가지 섞였는데...”라며 몇 가지의 색을 대는게 아닌가. 나한테는 그저 보라색인 스웨터가 그들 눈에는 알록달록하게 보였을까. 녹색처럼 영 뚱딴지 같은 색까지 섞였다고 해서 진짜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런 여러 색들이 어울려 조화롭게 보라색을 꾸민게 보인다면, 세상 모든 색이 그렇게 보인다면, 도대체 그들이 사는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 짐작도 안간다.
내가 즐겨보는 유투버 중에,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미국 학생들이 k-pop에 대해 리뷰하는 채널이 있다. 그들 역시 내가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즐거워한다. 화성인지, 코드의 진행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 귀에는 그냥 하나의 멜로디가 아니더라. 내가 듣는 것, 그 이상의 많은 것을 듣고 즐거워하기도 하고 자기들기리 막 토론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어쩐지 그들만이 듣고 있는 세상이 부러워서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들의 리뷰를 보며 아른거리는 그 세상을 가늠해보곤한다.
누군가의 세상이 다채로운 색으로 구성되어있고, 또 다른 누군가의 색이 음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나의 세상은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그래서 내 이야기가 단조로울 때 나는 괴로워하고 더 풍성한 이야기를 찾는다. 가끔 한 겹의 이야기인 줄 알았던 것의 한 켜를 들어내고 그 밑에 깔린 것을 발견하면 기뻐하며 이 기쁨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진다. 원래 기쁨은 나누면 배가 아니던가. 새로운 해석의 여지, 복잡 다단하게 직조된 의미, 깊은 곳에서 길어올리는 진실. 이런 것들이 나의 세상을 구성하고 있고 나는 이 세상을 사랑한다.
남아공에서 만난 내 친구의 괴로움은 그런거였다.각양의 소리와 음으로 구성된 세상을 살고 있을 내 친구에게, 당장 함께 음악에 대해 나눌 친구가 없다는거. 좋아하는 음악가 이야기, 악기 이야기, 공연 이야기, 음악 이야기 그런 것들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데, 망망대해의 무인도처럼 혼자 있는 느낌이란다. 그나마 남편이 성악을 전공한 사람이라 다행이긴 하지만, 네 아이를 기르는 입장에서 남편은 전우일 뿐, 음악 이야기를 나눌 짬이 쉬이 날 리가 없다. 아하하하 네 명이라니. 진짜 나는 -_-;;; 하나로도 죽겠구만.
여튼 네 아이를 기르며 정신없이 지내오다, 막내 아이가 데이케어에 다니며 잠시 짬이 나자 그녀 속에 하나님께 받은 한 조각이 친구를 많이 괴롭히기 시작했나보다. 자기를 쓰라고, 파묻어두지 말라고. 하지만 전공자로서 너무 오랫동안 피아노를 떠났다며 손이 굳어 클래식을 할 수는 없겠고, 키보드를 쓰는 재즈 피아노 쪽을 공부해보고 싶다고 그러더라. 문제는 이 남아공 시골구석에서 재즈 피아노 선생님을 찾아야 한다는거지! 게다가 영어나 아프리칸스로 레슨을 받아야 할테니 언어의 장벽도 함께 뛰어 넘어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 친구가 그 장벽을 넘어 무언가 보여줄 거라는 기대를 품게 되었다.
왜냐하면, 친구네 집 거실에는 낡은 피아노가 한 대 있기 때문이다. 친구 남편이 이사오자마자 아내를 위해 중고 피아노를 한 대 구해다 놓았단다. 친구는 그 피아노를 두고 조율이 필요하다며, 두 음이나 낮다고-솔직히 그게 무슨 말인지 나는 이해가 안가지만..피아노가 전체적으로 두 음이 낮아질 수 있나??- 어떤 건반들은 소리가 잘 안난다며 부끄러운듯 말하면서도 마루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피아노를 놔두었다. 친구네 집에 방이 네 개나 있는데, 피아노는 거실을 차지하고 있다. 비록 친구가 그 피아노를 연주하는 건 한 번도 못보고 우리는 늘 주방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지만, 그 거실에 있는 낡은 피아노가 있기에 나는 이 친구가 반드시 피아노를 다시 칠거라 생각했다.
영소설을 전공하며, 내가 인물분석을 할 때 가장 주의를 기울여 읽는 장면은 그 사람의 공간에 대한 묘사이다. 작가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그의 공간묘사, 거기에 놓인 소품들이나 분위기를 통해서 전달하기 때문이다. 인물의 대사도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거짓말을 하기에, 대사를 다 믿을 수는 없다. 그에 반해 공간묘사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비틀지 않은 이상 그 인물의 진솔한 면을 이야기해준다.
그래서 내 친구네 집 거실의 낡은 피아노를 떠올릴 때마다 친구의 단단한 속사람을 기억한다. 곧 쓰러질 것처럼 파리한 낯색과 배짝 마른 몸으로 “음이 안맞는 낡은 피아노다, 내가 뭐 이제 다시 피아노를 칠 때가 오겠나” 말했지만, 그 피아노를 거실에 둔 친구의 속사람은 재즈 피아니스트로 도약할 기회를 노리며 웅크리고 있는 사냥꾼이었으니까. 이제는 둘 다 남아공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삶을 꾸리고 있지만, 어느 날 카톡으로 안부문자와 함께 연주 영상이 올 그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고 기다리며 나의 이야기 세상에 이 기록을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