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스팸메일

열여섯 번째 조각

by 시골쥐의 풀방구리

나에게 스팸선물세트는 어떤 의미가 있는 지표 같은 거였다.


결혼하고서도 나는 계속 논문도비 대학원생이었고 기껏해야 시간강사였기에 딱히 명절선물이라는 걸 받을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사정도 그리 다를 바 없어 신학생, 과외선생 혹은 선교단체 간사여서 월급도 없는 마당에 명절선물이란 언감생심이었다. 때문에 명절이면 양손에 선물세트를 들고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나는 조금은 부러웠던 거 같다.


그래서 남편에게 농담 삼아 "나는 나중에 명절 때 스팸선물세트를 받는 성공한 사람이 될 거에요! 김세트 말고.."라고 말하곤 했었다. (비슷하게 비서가 스케줄 관리해 주는 삶이라는 자매품도 있다. ㅋㅋㅋ) 누구에게도 말하진 않았지만 우리 부부에게 스팸세트는 은전 한 닢 그런 의미였다. 소박한(?) 성공의 의미.


더욱이 남아공에서는 스팸 한 캔이 만원이었기 때문에 내 맘속에서 스팸은 더욱 별과 같은 존재가 되었더랬지. 앞길이 막막한 논문도비로서 밤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사람구실은 언제부터 할 수 있을까 나이만 먹고 일자리도 못 구하는 게 아닐까 잠 못 이루고 고민하던 나날들이 많았기에 "스팸세트를 받는 사람"이라는 위치는 더 간절하고도 멀게 느껴졌더랬다.


학위를 딴 후, 어디로 갈지 무얼 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냅다 짐 싸 후다닥 귀국을 하던 그 시점에도 남편에게 "자 이제 스팸선물세트를 받는 인생이 되도록 힘냅시다!!"라고 웃으며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우야동 한국에 와서 첫 달을 보내다 보니 월말에 설이 있는 게 아닌가. 해외살이를 오래 했다 보니 한국의 명절에 대한 감이 없던 터였다. 그냥 연달아 쉬는 날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설이 가까워 오며 저녁에 교회사택-우리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이 한 번씩 들르셔서는 설선물이라며 선물상자들을 놓고 가시는 거다.


월급도 없는 선교단체시절에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일이기에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남편과 나는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이 들더라. 이를 어쩌지, 이걸 받아도 되나, 이걸 어떻게 갚나... 그런 마음이 무거운 기분. 그런데 그 와중에 내 눈에 보이는 게 있었으니.


리챔 한 박스와 참치 한 박스였다.



리챔.. 이면 약간 애매하지만 스팸선물세트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잖을까. 귀국 후 스팸선물세트를 받는 사람이 되자!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이렇게 달성된다고? 이건 미션 클리어인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던 차에 한 성도분이 선물세트를 주시고 가셨다.


앗 이번에는 진짜 스팸이다!! 남편에게 이걸 보여주며 "우리 스팸선물세트를 받는 사람이 되었어!!"하니 갑작스러운 명절 선물들에 부담감을 느끼던 남편도 스팸을 보고는 웃더라. :)


그러다 설이 다 지나고 뒤늦게 택배가 하나 왔다. 막냇동생이 꼬마쥐 설선물이라며 보냈다는데.

스팸이 하나도 아니고 두 박스.. 야 돈으로 달라고!!

그리하여 귀국하여 맞이한 첫 설은 유독 스팸이 넘쳐나는 명절이었다. 이 때 받은 스팸들을 일 년이 다 가도 먹지 못했으니 말해 뭐하겠는가.


"스팸 선물세트를 받는 성공한 사람"은 남편과 나 사이의 농담 같은 거여서 누구에게 딱히 말하거나 기도를 한다거나(!!) 한 적이 없었는데.


그냥 언제나 날 지켜보시는 하나님이 내 속에, 농담에 묻어있던 작은 소망에 답하신 것 같아 감사할 뿐이었다. 사람은 한 치 앞의 미래도 모르면서 걱정은 또 한 사오십 년 치를 하지 않던가. 나도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 지금 우리는 잘하고 있는 걸까부터 시작해서 남편의 목사 안수 후, 우리의 사역방향이라던지 내 앞길이라던지, 꼬마쥐의 미래라던지 많은 걱정과 예측 속에 헛다리짚기가 일상인데 하나님이 그 아등바등거리는 나에게 '괜찮아. 내가 있잖아.'라고 하시는 듯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6~27


내가 경험해 온 하나님은 꽤 유머러스한 분이신데 오랜만에 돌아와 고국에서 맞이한 첫 명절에 새삼 느꼈다. "괜찮아, 염려하지 마. 나는 네가 가고 있고 살고 있는 삶을 기뻐하고 있단다"라는 메시지를 이 넘쳐나는 스팸들 속에서 받았달까. 그렇다면 이건 스팸 메시지인 건가..


애니튼. 성도님들께는 사랑의 빚진 마음을 하나님께는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 첫 설을 보내며 나는 방정맞게도 남편에게 "이젠 상주반건시곶감을 받는 사람으로 목표를 상향조정해야겠어요"라고 농담을 했고, 수개월 뒤 맞이한 추석의 첫 선물은 놀랍게도-혹은 놀라울 것도 없이, 상주 반건시 곶감 한 상자였다.


그 이후로 나는 지금껏 명절 선물에 대해서는 그 어떤 농담도 하지 않는다. 입이 간질거려도 참는다. 지금도 손끝이 간질거리지만 절대, 아무 말도 적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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