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에 겨울이 오면 평양냉면을 먹어야 한다.

열네 번째 조각

by 시골쥐의 풀방구리

8월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겨울의 끝자락을 감아쥐고 있었다. 상상도 못 했건만, 아프리카도 겨울에는 춥다. 물론 한국의 매서운 혹한에 비할바는 아니었지만, 남아공도 겨울이면 0도까지 내려가 제법 추웠다. 게다가 아프리카의 집들은 꼬마돼지 삼 형제가 지었는지, 단열도 잘 안되고, 그 어떤 난방시스템도 없었다. 따로 가스난로라던지 전기로 돌리는 오일히터를 써야 했는데, 겨울이면 절절 끓는 바닥에서 귤을 까먹던 한국인으로서는 정말 성에차지 않는 일이었다. 털 슬리퍼에, 수면바지에, 도톰한 가운까지 걸치고 가스난로 앞에 앉아 아프리카의 겨울이 이다지도 추울 일인가 툴툴거릴 때 즈음 난데없이 평양냉면이 치고 들어왔다.


겨울이시군요. 그렇다면 평양냉면을 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난 평양냉면이 먹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무얼 먹어도 만족스럽지 않았고, 평양냉면만 생각났다. 한 입 가득 물면 툭툭 끊겨나가는 면발과, 슴슴하지만 감칠맛이 도는 육수, 곁들여 먹는 아삭하고도 시원한 맛의 무채. 나는 이 평양냉면을 먹어야만 했다. 서울이었다면 가까운 평양냉면 전문점에 뚤레뚤레 가서 한 그릇 먹고 이 갈증을 해소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나는 남아공의 소도시에 살고 있잖은가. 평양냉면은 고사하고 가장 가까운 한인마트조차 왕복 300km 거리였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도착한 다음날 여권과 지갑을 도둑맞아 신분증이 없어 운전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러하니 포기해야 마땅하건만, 추우면 추울수록 평양냉면이 더욱 간절해져만 갔다.


그렇다. 냉면, 적어도 평양냉면은 겨울 음식이다. 육수의 근간이 되는 동치미부터가 겨울의 산물이지 않은가. 친가와 외가 모두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이었던 터라, 내 몸은 추운 겨울이면 으레 평양냉면을 찾도록 각인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겨울이시군요. 그렇다면 평양냉면을 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어떻게? 정착을 도와주신 고마운 한인 가정들에게 김치까지 나눔 받아 황송한 마당에 평양냉면을 먹고 싶다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제는 홀로 서야 한다. 지구 반대편 이 낯선 땅에 남편과 나, 아기 셋이서 힘을 합쳐 둥지를 틀고 살아나가야 한다. 그 첫 발자국으로 나는 평양냉면을 손수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 낯선 겨울을 나의 겨울로 만들려면, 내게는 평양냉면이 필요했다.


인터넷을 뒤져 평양냉면 만드는 법을 찾아보니 의외로 간단했다. 동치미와 양지 육수를 섞고, 국간장으로 간을 하면 된단다. 어디선가 밥 아저씨가 참 쉽죠? 하면서 이젤 앞에서 붓을 들고 미소 짓는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먼저 재료를 구하러 동네 마트에 가보니 신기한 세상이 펼쳐졌다. 한국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가지는 계란처럼 둥글었고, 시금치 잎은 손바닥보다 컸으며, 쥬키니 호박은 성인 종아리만 했다. 도대체 여기는 어떤 곳인 걸까.


동치미를 담그기 위해서는 무가 필요한데 남아공 사람들은 무를 안 먹기에 마트에서 무를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나는 운이 좋게도, 겨울에 잠깐 나오는 단무지 무를 구할 수 있었다. 평생 원통형의 단무지를 먹어왔으면서도, 그 길쭈름한 원통 모양이 무 본연의 모습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묵직하고 두꺼운 조선무 대신, 모델 다리처럼 미끈하게 쭉 빠진 단무지 무. 일제 강점기도 끝났건만, 내 손에 들린 무는 단발령을 겪은 건지 머리를 삭발당하고 삐죽삐죽한 무청의 흔적만 갖고 있었다. 그래도 이거라도 구한 게 어딘가. 무가 없으면 나는 양배추나 파스닙, 혹은 당근으로라도 동치미를 담글 태세였단 말이다. 이제 나는 이 단무지 무와 야리야리한 쪽파 다발을 가지고 동치미를 담글 수 있게 되었다.


동치미를 담가 며칠간 익히고, 양지고기를 사 와 폭 삶아 육수를 뽑고 수육을 만들면서 나는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이 낯선 곳에서도 나는 잘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구쳐 올라왔다. 동시에 의심도 싹터왔다. 정말 이걸로 될까. 이렇게 간단하게 동치미와 육수, 국간장을 섞으면 내가 사랑하던 그 평양냉면 육수가 된다고? 그게 정말 될까? 그렇게 자신감과 의심을 오가며 동치미가 익기를 기다렸고 마침내 평양냉면을 먹는 그날이 왔다. 면은 한국에서부터 들고 왔던 국수가 있어서, 툭툭 끊기는 건 비슷해라는 마음으로 대체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육수. 인터넷에서는 동치미와 양지육수, 국간장을 섞으면 된다고 했지 비율까지는 나와있지 않았더랬다. 기억에 의존하여 먹어보며 섞는 수밖에 없다. 먼저 동치미와 육수를 섞고 맛을 봤는데, 니 맛도 내 맛도 아니다. 괜히 며칠 동안 고생만 한 것 같아 우울해질 것만 같았지만, 어차피 망친 거 끝까지 해보자 싶어 국간장을 조금 넣어 간을 맞췄다. 그리고 다시 국물을 마셔보는데, 갑자기 마법처럼 내가 먹었던 평양냉면 육수맛이 정말 나는 게 아닌가.


“여보! 여보! 이리 와서 빨리 이거 먹어봐요!” 남편도 한달음에 달려와 먹어보더니 기가 막혀했다. 아프리카에서 정말로 내가 평양냉면을 만들어낸 것이다. 찬물에 씻어놓은 국수면 위에, 삶은 계란을 얹고, 양지고기를 올린다. 그리고 평양냉면과 늘 함께 먹었던 불고기 대신 오늘은 손수 치대 만든 떡갈비를 곁들이면 완성. 겨자가 없어 아쉽다. 마트엔 와사비나 머스타드만 있었는데, 그래도 와사비가 겨자와 맛이 더 비슷하지 않을까. 하여튼 식초와 겨자는 취향껏 올리면 된다. 나는 아주 희미하게 퍼져 나오는 감칠맛을 잡아 올려 즐기는 것을 좋아하기에, 반 그릇 정도까지는 식초도 겨자도 없이 먹는 것을 좋아한다.


준비는 며칠이 걸렸는데, 평양냉면을 먹어치우는 데에는 십 분밖에 걸리지 않은 것 같다. 내가 만든 평양냉면은 면도, 육수도, 고명도 모두 조금씩 모자란 어딘가 엉성한 한 그릇이었지만, 그 한 그릇은 내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사실 남아공에 도착하자마자 도둑을 맞고 나니, 가뜩이나 낯선 환경과 사람에 적응하느라 긴장되는데 두려움까지 더해졌더랬다. 하지만 이 한 그릇의 평양냉면은 “아프리카에서 평양냉면도 만들어 먹는데, 무엇인들 못하겠어!”라는 당찬 마음만 남기고 긴장과 두려움을 시원하게 씻어가 버렸다.

겨울이시군요. 그렇다면 평양냉면을 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낯설디 낯선 8월의 한겨울이, 나의 겨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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