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 그릇을 사냥하려면...

열세 번째 조각

by 시골쥐의 풀방구리

잘그락!

분명히 난 기척을 느꼈다.


작열하는 태양이 수분을 머금은 것은 무엇이든지 찾아 마지막 한 방울까지도 빼앗아가버리는 폭력적인 아프리카의 여름 날.

나는 살기위해 중고가게로 들어섰다.

건조한 여름이라서일까.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서늘함이 나를 반겨주었고, 차마 다시 뙤약볕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나는 가게 안으로, 어둑한 선반을 따라 깊숙히 깊숙히 걸어가던 중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나만이 들을 수 있는 그릇의 목소리를 들었다.

숨을 들이킨다.

갈대 끝에 앉은 잠자리를 잡을 때처럼.

흡.

들이킨 숨의 끝에 잠시 멈추고 선반 위로 손을 내민다.

소복한 먼지 한 톨 날리지 않도록, 최대한 나의 인기척을 지우고 다가간다.


달그락.

디저트 디쉬, 앞접시 크기의 접시들이 쌓여있는 탑을 한층 한층 해체한다.

한 장, 한 장 내려놓아 역으로 탑을 쌓아가는 한 편, 매의 눈으로 살핀다.

다른 무리의 뒤에 숨어 얼렁뚱땅 도망가지 못하도록 샅샅이 치밀하게 뒤져야 한다.

의심스러운 녀석은 지체없이 뒤집어 백마크를 확인해 출신지역과, 회사, 연도를 기억해둔다.

사실 이 접시탑은 지난 몇 주간 수차례 수색을 마쳤기에 별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오늘은 다르다.

나는 분명히 녀석의 존재를 느끼고 있다.


한 장, 한 장 살피다보니 수상한 녀석이 하나 보인다.

언뜻 보면 세상 둔탁한 테라코타 도자기처럼 보이는 접시.

지난 주에도, 그 지난 주에도 이 접시 탑 속에서 이런 접시를 나는 몇 장이나 봐왔었다.


오늘은 달랐다.

나는 이 촉감을 알고있다.

테라코타 도자기인 듯 해보이지만, 거칠고 투박할거라는 예상을 비웃는 듯한 매끄러움.

묵직한 무게감.

뒤집어봐도 백마크가 없어 이 그릇의 출신을 가늠할 수가 없다.

상관없다.

이 그릇이 내가 생각하는 그릇이 맞다면, 백마크는 중요하지 않다.

이 라인은 그 기이할 정도로 매끈한 표면 때문인지 50년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백마크가 지워지는 일이 흔하다 했다.


그렇다면 이 녀석이 정녕 내가 찾던 그 녀석인가.

입이 바싹 마른다.

조바심이 갑자기 심장을 죄어오는 듯해 심호흡을 해본다.

긴장하면 안된다.

조급하면 안된다.


가만히 눈을 감고 떠올려본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촉감.

나는 이 그릇을 알고 있다.

아니, 사실은 사진으로만 접했었다.

그런데 마침 엊그제, 친구 J가 빈티지 찻잔을 새로 구했다며 나를 초대해 커피를 대접했고, 그곳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라인의 톨컵을 처음으로 만져볼 수 있었다.

세상 촌스럽다며 나는 싫다했던 그 컵이 이렇게도 매혹적일 줄이야.

돌맹이처럼 딴딴하고 묵직한 바디감에 그 사각일듯 매끄러운 피부.

게다가 입술에 닿는 그 테두리의 곡선은, 고양이가 마치 내 다리를 머리부터 꼬리까지 감고 지나가듯 나를 매혹시켜버렸다.


나도 갖고싶어.


그랬는데, 내 눈앞에 있는 이 컵받침에서 엊그제 그 감각이 되살아나고 있다.

손 끝 지문의 골짜기 골짜기에서 "찾았다"라는 소리가 메아리쳐울린다.

이건 분명 그 녀석이다.

J의 집에서 직접 만져보기 전에는, 중고가게의 선반에서 몇 주동안 수차례나 봐왔으면서도 장님처럼 지나쳐버렸던 그 그릇이 오늘은 또렷하게 살아 숨쉬는 것이 보인다.


다! 다 내거야!


타겟이 좁혀졌으니 이젠 신중하기보다는 신속하게 움직일 때다.

잽싸게 탑을 해체하며 목표 그릇만 옆으로 따로 빼둔다.

모두 넉 장.

컵받침 안쪽의 옴폭한 부분을 살핀다.

노련한 헌터라면, 이 흔적만으로도 컵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머그 컵 받침이 두 개, 티 컵 받침도 두 개.


쿵쾅쿵쾅.

심장이 터질 것 같다.

J의 톨컵은 믹스커피 하나를 간신히 타 마실 사이즈.

실용성이 적다.

수렵체장을 간신히 넘긴 녀석.

하지만 머그와 티컵은 다르다.

완연히 성장한 녀석들.


어디냐. 어딨는거냐.

받침만 놔두고 어디에 숨어있는거냐.


흥분해서 떨리려는 손끝을 움켜쥐고 진정해본다.

나는 이 교활한 녀석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다.

새끼를 지키기 위해, 둥지에서 먼 곳으로 포식자를 유도하고자 날개가 부러진 척 연기를 하는 어미새의 전략.

이 컵받침들의 간악한 술수는 간파되었다!

나는 노련한 빈티지 헌터이니까.


그 때 내가 있는 복도 끝에 다른 손님이 등장했다.

나는 몸을 웅크려 내가 발견한 보물들을 가린다.

그리고 짐짓 지루하고 관심없다는 듯 그릇 탑들을 툭툭 건드린다.

오늘도 공쳤네. 여기 별 볼일 없네.

뭐 더워서 들어왔는데 이런 곳에 무슨 쓸모있는게 있겠어요?하는 표정을 눙치듯 던진다.

하지만 내 등에 털이 있다면, 그 털들은 모두 바짝 곤두서있을 것이다.


건드리지 마.

이곳은 내 사냥터야.


끝없이 뻗어있는 그릇 선반의 저 깊은 곳이 아른거리며 날 부른다.

경쟁자의 등장에 초조한 마음이 눈 앞을 흐리게 한다.

어떻게 하지. 나보다 먼저 발견하면, 눈앞에서 채가면 나는 어떻게 하지.

끔찍한 상상에 자꾸 먼 곳을, 나에게서 먼 저 복도 끝의 선반을 바라보게 된다.


정신차리자! 나는 노련한 사냥꾼 아닌가!

컵받침들이 나타나 나의 시선을 끈 이유는, 분명 컵들의 둥지가 근처에 있다는 뜻이렸다.

자꾸 멀리 가고 싶은 느낌을 억누르고 근처부터 차근차근 수색해 나간다.

행복의 파랑새가 옆집에 있었던 것처럼, 오히려 너무 어려운 곳을 찾으면 안된다.

이 영악한 녀석들은 허를 찌르듯 등잔 밑에 숨어있을 확률이 높다.


어디냐. 어디에 숨었냐!


유레카!!!!!!!!!!


나의 예상대로 머그컵 하나가 눈에 가장 잘 띄는 선반 앞줄에 무심히 놓여있었다.

매가 닭을 낚아채듯, 매섭게 하지만 그릇이 다치지 않도록 우아하게 머그컵을 낚아챈다.

아직. 아직 끝이 아니다.


중고가게의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는 분명히 보이질 않는다.

하여 손끝의 감각을 예리하게 벼려 입술이 닿는 컵 테두리를 더듬어 만져본다.

그날의 촉감을 되살리는 것도 있지만, 이곳이 중고가게이고 50년이 넘은 컵이다보니 금이 가거나 칩이 가있을 때가 왕왕 있다.

하자있는 녀석이 희생양으로 나와있을지도 모르는 것이기에 꼼꼼히 손끝으로 본다.

희망을 담은 손끝이 컵의 테두리와, 손잡이 모서리들을 샅샅이 수색한 끝에 합격판정을 내린다.


나는 소리지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머그컵을 들어 차 받침 위에 올려본다.


달칵.


머그컵이 옴폭 파인 차 받침에 딱 들어맞는다.


다시금 마음 속에서 환희와 비명이 소용돌이친다.

마침내! 나도! 이 컵을 손에 넣었어!!


나머지는? 나머지는 어디있는거야.

니 친구들이 어디있어!

컵에 멱살이 있다면 잡고서 흔들어 추궁하고 싶을 지경이다.

머그 컵이 한 세트 생겼으니, 티 컵도 한 세트가 갖고 싶다.

아니, 남편과 커피 타임, 티 타임을 즐기게 내가 찾은 소서에 맞는 머그와 티컵들을 모두 찾아내고 싶다.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선반을 훑어보지만 더 이상의 수확은 없다.

하나만! 하나만 더!

쪼그려 앉아 아래쪽 선반까지 샅샅이 뒤지다보니 손이 먼지로 시커매졌지만 쉽사리 그만둘 수가 없다.


마음같아선 가게문이 닫을 때까지 이곳을 이잡듯 뒤지고 싶지만 어느덧 딸아이의 하교시간이 다 되었다.

안타깝다.

왜 내게 주어진 헌팅 시간은 늘 이다지도 짧은걸까.


품 안의 노획물을 바라본다.

한 조의 머그컵과, 짝잃은 컵받침 세 개.

컵받침의 짝을 모두 찾지는 못했기에 아쉽긴 하다.

그러나 함께 빈티지 그릇을 모으는 친구들에게 자랑스레 무용담을 늘어놓기에는 손색없는 사냥감들이다.


그리고 이 곳은 중고가게.

언제 어디서 내가 찾는 컵이 튀어나와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정글.

컵 없는 컵받침이 무슨 쓸모냐 물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뭘 모르는 소리이다.

다음 헌팅 때, 컵을 찾았는데 정작 컵받침이 도망가 안보이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니 비록 컵이 없는 받침이 세 개일 지언정 모두 잡아가기로 한다.


분명히 언젠가, 미래의 내가 잡아낼 테니.


잘그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