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꽃잎 진 자리, 고운 조각보

열한 번째 조각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함박눈을 맞고도 붉은 꽃을 피워내는 동백나무가 떠오른다.

올해로 100세가 되시는 나의 외할머니에게는 내가 알기로 다섯 명의 자녀가 있었다.

4남 1녀.

그러나 내가 실제로 만나본 건 우리 엄마와 막내 외삼촌, 단 둘 뿐이다.

할머니의 젊은 시절은 가혹하고도 시린 겨울이었고, 그 모질고 매서운 겨울을 이기지 못한 어린 꽃들이 후드득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첫 번째 동백꽃은, 함흥부두의 겨울바다 위로 떨어져 버렸다.

할아버지가 출장 간 새 전쟁이 터져버린 탓에, 할머니는 홀몸으로 자식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할머니는 나에게 그 피난길, 정확히는 함흥부두에서 미군의 배를 타고 거제로 내려오는 길에 아들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에는, 어떻게 배라는 닫힌 공간에서 아들을 잃어버릴 수가 있을까 이해가 안 갔다. 나중에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나서야 왜 피 같은 어린 아들을 잃어버렸는지 알 수 있었다.

영화에서 묘사된 함흥부두의 피난 장면은, 내가 경험한 유람선 탑승과는 사뭇 달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걸고 군함에 달겨들어 기어오르기도 하고 차가운 바닷속으로 떨어지기도 하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나는 아둔하게도 영화를 보고서야 비로소 할머니가 어떤 아수라장을 거쳐갔는지 깨달았다.

할머니의 그 시절 이야기는 항상 조각나 있었고 희미한 안개에 싸여 있는지라, 할머니가 피난길에 겪은 고초의 상세한 사정까진 듣지 못했다.

피난길에 잃은 자녀가 함흥에서 배타다 잃어버린 그 하나뿐인지, 아니면 더 있었는지는 모른다.

캐묻자니 드러날 진실이 직면하기 무서워, 할머니의 상처를 들쑤시지 않는다는 핑계로 그냥 듣기만 했다.

하여,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건, 한 명의 삼촌을 그렇게 잃었다는 사실뿐이다.


거제에 도착한 할머니는 밀수품을 옷 속에 숨겨 팔며 하루하루 꾸려가다가 자식을 데리고 홀아비 신세가 된 외할아버지를 만나 재혼을 하셨다.

외할아버지는 목수셨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거제 난민수용소를 떠나 부산으로 나와 사셨다.

그때 부산에는 나무로 지은 쪽방 피난촌이 있었는데 대화재가 나서 싹 타버리는 사건이 있었단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으로 인해 전소된 피난촌을 다시 지어야 했기에 목수였던 할아버지는 돈을 적잖이 마련하실 수 있었다.

그래서 그걸 기반 삼아 서울로 올라와 지금의 이태원, 해방촌에 자리를 잡게 된다.

외할아버지에게는 전처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의붓아들과 외할머니의 둘째 아들 사이에 불화가 있어 그만 둘째 아들이 가출해 버렸단다.

그 아들은 가출 후 소식이 없었고, 할머니는 그렇게 나가서 죽었던 것 같다며 시간이 흘러 사망신고를 했다고 하셨다. 그렇게 할머니의 두 번째 꽃송이가 소리 없이 사그라들었다.


재혼한 외할아버지와의 사이에서 할머니는 처음으로 딸을 낳았고, 그게 우리 엄마다.

그리고 막내 삼촌도 태어났다.

피난길에 잃은 한 명, 가출한 한 명, 남아있는 한 명, 남에서 낳은 두 명.

내가 아는 다섯의 자녀가 생겼다.

안타깝게도 서울로 이사 후, 어린 딸을 그리도 아끼고 예뻐했다던 외할아버지는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다시 홀몸이 되어 자녀들을 건사해야 했던 할머니는 구멍가게, 이태원 위쪽 하얏트 호텔의 메이드 등등을 하며 악착같이 아이들을 길렀다.


셋째 외삼촌은 할머니에게 적잖이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되는 아들이었다.

생사도 모르고 헤어진 첫 남편, 먼저 떠나보낸 두 번째 남편, 함흥부두에서 잃어버린 아들, 말 안 듣는 의붓아들, 가출해 버린 둘째 아들을 잇는 이 셋째 아들은 그렇게 상냥하고 좋은 아들이었다고 했다.

사실상의 장남이었을게다.

하지만 이 셋째 외삼촌은 몸이 약했다.

군대에 갈 나이가 되었는데 46kg밖에 나가질 않았다.

원칙대로라면 면제대상이었으나, 당시 흔했던 병역비리에 의해 빽 있는 누군가가 대신 빠져버리고 삼촌은 입대해야 했다.

그 결과 할머니의 손에 남은 것은 의지가지 하던 셋째 아들의 사망통지서.

그때 할머니는 처음으로 화병이 났다고 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아들이 덧없게, 또 억울하게 짓밟혀버렸고 할머니에게는 서울에 와서 얻은 어린 두 자녀만 남게 되었다.


다행히 그 두 자녀는 무사히 성인이 되었고, 세월이 흘러 다섯 명의 손주를 보셨다.

그리고 내가 딸을 낳아 증손녀까지 보셨다.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한 할머니의 한 세기는 그렇게 험난했다.

나는 그 험난함의 깊이를 다 알지 못한다.

다만, 예전에 영화 국제시장을 보니, 너무나 할머니의 이야기와 비슷하기에 같이 보러 가시겠냐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나는 추억일 줄 알았지만 할머니는 "그게 무슨 좋은 기억이라고 보러 가냐"며 딱 잘라 거절하셨다.

아직까지 그 시절은 할머니에겐 들춰보기 싫은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그 험하고 모진 세월을 지나가면서도 할머니의 속사람은 전혀 거칠어지지 않았다는 게 나는 늘 신기하다.

곱디고운 우리 할머니.

곽연옥 여사.

10월이면 꼭 채워 한 세기를 살아낸 우리 할머니의 세월은 치매라는 병증 앞에 점차 사라지고 있다.

나마저 잊어버리면 이 조각들이 영영 사라질 듯하여, 조각보로 이어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이 동백나무 아래에 펼쳐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