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Song of songs)

열두 번째 조각

by 시골쥐의 풀방구리

툭.

양동이를 발로 차면 그 위에 서있던 죄수가 매달리며 교수형에 처해진다.

그래서 영어는 “양동이를 차다(kick the bucket)”는 표현에 '죽다'라는 뜻을 담았다.

여기에서 “버킷 리스트” 즉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칭하는 말이 뻗어 나왔다.


사실 우리 모든 생명체들은 목에 올가미를 매고 양동이 위에 아슬아슬하게 발끝으로 서있는 존재들이다.

괜히 삶이 고통이라 그러겠는가.

그 좁디좁은 양동이 바닥면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발끝으로 버티고 서있는 걸 우리는 생이라고 부른다.

그 절박한 발끝을 보고 있자니 발레리나의 토슈즈가 떠오른다.

발끝으로 서고 춤을 추는 푸앵트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발레리나들의 발은 험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거쳐야 한다.

발톱이 빠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뼈가 변형되는 고난의 과정이다.

관객은 알 수 없는 무대 뒤의 피땀 어린 시간들이 무대 위의 비현실적인 아름다운 푸앵트 동작들을 만들어준다.

끝없이, 우주처럼 끝없이 펼쳐진 하얀 공간에 셀 수 없는 양동이들이 놓여있다.

그 위로 하늘로부터 올가미들이 드리워져있다.

올가미에 목줄이 채워진 채, 좁디좁은 양동이 위에서 처절하게 깨끔발을 하고 있는 생명들.

우리가 살며 겪는 고통들은 그 끝에 아름다운 푸엥트로 이어질 것인가.


모든 양동이들의 종말은 동일하다.

어디선가 별안간 튀어나온 누군가의 발이 그 양동이를 차버린다.

언제 차는 건지, 어디서 그 발이 튀어나오는 건지, 왜 내 양동이를 치우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아는 것은 내 발끝을 지탱하는 이 양동이를 누군가 반드시 차버릴 것이라는 사실.

이 무자비함 앞에 아름다움이 가능할까.

하지만 신이 내 버킷을 치워버리기 전에, 나는 무엇이라도 해야겠다.

그러하니 나의 버킷 리스트는 무엇일까.


나는 화려한 위업을 바라지 않는다.

나의 버킷리스트는 그저 당신인 것 같다.

홀로 서있는 양동이지만, 지난 십여 년을 함께 지내온 당신이 있어 즐거웠다.

양동이 바닥이 별안간 다가오며 사방으로 펼쳐진다.

끝없이 뻗어나가 눈밭이 된다.

신혼 초, 그저 눈이 많이 온다는 이유 만으로 괜히 밖에 나가 우산 하나 나눠 쓰고 하염없이 걷던 그 길이다.

노란 가로등 불빛 때문일까.

그날의 눈은 참 따뜻하게도 희었다.

이는 할머니의 장례식 후, 함께 걸었던 눈밭이기도 하다.

아니, 백사장 같기도 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동북부의 인적 없던 바닷가.

당신과 나와 딸 셋이서만 있었던 그 곱디고운 모래사장이다.

나는 그 위를 당신과 걷는 게 참 좋았다.

결혼한 지 십 년이 넘어도 여전히 다정하게 손잡으며 내 곁을 걸어주는 당신이 참 좋다.

되도록 오래, 함께 걷고 싶다.

은퇴 후, 조용한 지방소도시에서 도서관 옆에 자리 잡고 조곤조곤 살고 싶다.

내가 비록 말은 항상 당신 은퇴 후 세계여행을 떠나고 싶다 했지만, 사실 세계를 떠돌지 않아도 당신과 함께 하면 어딘들 신나지 않을까.

당신 곁에 있으면 늘 새로운 모험이었고, 항상 편안한 쉼이었다.

돌이켜보니 이미 넘치도록 감사한 것들 뿐이다.


그러니 이 위에 서 있는 한, 끝까지 함께 걷자.

나와 오래오래 함께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