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시, 만만치 않다.

Day 25,26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by 시골쥐의 풀방구리

<아디오스! 산티아고!>

산티아고 공항에서 마지막 한 톨까지 입에 털어 넣은 블루베리는 천국의 맛이었다. 그 달콤한 여운을 안고 도착한 부에노스아이레스. 한인 픽업 서비스 덕분에 입국부터 숙소 도착까지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픽업 사장님은 앞으로 5일간의 알찬 여행을 위한 정보들을 쏟아내셨고, 나는 우루과이 당일치기와 티그레 뱃놀이를 꿈꾸며 열심히 받아 적었다. 그래, 그때만 해도 나는 몰랐다. 인간이 이토록 한치 앞을 못 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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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극장을 개조했다는 ‘엘 아테네오’ 서점은 명성대로 화려했고, 지하의 어린이 서점에서 딸아이와 한참을 놀았다. 모든 것이 완벽한 출발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첫 번째 시련과 마주했다.



<고기를 눈앞에 두고 왜 먹지를 못하니>

아르헨티나에 왔으니 첫 저녁은 당연히 소고기였다. 문제는 아빠가 특수부위인 ‘안창살’을 드시고 싶어 하셨다는 점이다. 픽업 사장님께 스페인어 단어까지 배워가며 야심 차게 마트 정육 코너에 갔지만, 직원이 내민 것은 50cm는 됨직한 납작 길쭈름한 고기 한 덩이였다.

딱 봐도 내가 알던 안창살이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의 ‘횡격막’을 통째로 사 온 것이었다. 얇은 고기 앞뒤로 붙은 질긴 ‘막’은 제거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에어비앤비의 식칼은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칼날이 둔하기 짝이 없었다. 아빠가 한참을 씨름한 끝에 겨우 구워봤지만, 질겨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더 약 오르는 건, 어쩌다 씹히는 부위의 고기 맛이 기가 막혔다는 사실이다.

“으아아악! 맛은 있는데 먹지를 못하겠어!”

그날의 저녁 식사는 그렇게 처참하게 실패했다. 우리는 내일 한인타운 정육점에 꼭 들르리라 다짐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여러분, 현지 마트에서는 그냥 맘 편히 스테이크용 고기를 사시고, 특수부위는 꼭 한인 정육점에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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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하나도 신나지 않아.....

<길 잃은 밤, 잠든 꼬마쥐>

저녁 식사의 아쉬움을 달래려 남편, 딸아이와 함께 밤마실에 나섰다. 남아공에서는 상상도 못 할 해방감. 우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콜론 극장을 향해 걸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나는 구글맵을 보고도 정반대 방향으로 한참을 걸어가고 있었다. 내 안의 길치 본능은 이곳 남미에서도 여전했다.

신나게 걷던 딸아이는 금세 지쳐 안아달라고 칭얼댔다. 이대로 돌아가긴 아쉬워 결국 우버를 불러 콜론 극장에 도착했지만, 딸아이는 이미 내 어깨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남편과 나는 영혼 없는 감탄사("와아~")와 함께 서로의 인증샷만 찍어준 채, 허무하게 숙소로 돌아왔다.




<심카드 찾아 삼만 리>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되찾기 위해 심카드 사냥에 나섰다. 숙소 건너편에 통신사 ‘모비스타’ 매장이 있기에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그것이 두 시간 넘게 이어질 고행의 시작이었다.

직원은 "심카드는 팔지만, 충전은 밖의 다른 가게에서 해야 한다"고 했다. ‘엥?’ 싶었지만 일단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길거리 가판대에서는 안된다고 하고, 친절한 현지인이 안내해준 담배 가게에서는 모비스타는 취급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제야 시스템이 파악됐다. 블록마다 있는 담배 가게들이 각자 다른 통신사 충전을 대행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바둑판 같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를 하염없이 헤맨 끝에, 마침내 모비스타 충전이 가능한 담배 가게를 찾아냈다. 심카드 하나 충전하는 데 두 시간을 썼다. 넋이라도 있고 없었다.

기진맥진한 우리는 그날의 모든 계획을 취소했다. 어차피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쉬엄쉬엄 다닐 생각으로 일정도 길게 잡아놨다. 그저 한인타운에 가서 양념치킨으로 점심을 먹고, 한국 식료품을 한가득 사서 돌아왔다. 외국에서 만난 참외는 눈물 나게 반가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믿고 있었다. 남은 삼 일 동안은 탱고도 보고, 레골레타 묘지도 가고, 산뗄모 벼룩시장까지 알차게 다닐 수 있을 거라고. 어리석은 인간이여.

20190110_164941.jpg 아르헨티나 하면 역시 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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