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어린이 마음대로

Day 27-29.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지난 이틀은 '생존'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제 심카드도 장착했고, 맛있는 한식으로 기력도 보충했다. 오늘은 드디어 '문화'를 즐길 차례. 나는 탱고 공연, 레골레타 묘지, 산뗄모 벼룩시장을 아우르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모든 계획은, 딸아이의, 딸아이에 의한, 딸아이를 위한 단 하나의 장소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Day 27: 그러지마, 과거의 나야>

모든 것의 시작은 탱고 티켓이었다. 할인 티켓을 사기 위해 플로리다 거리의 판매소로 향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놀이터에 굶주린 딸아이는 콜론 극장 앞 공원에서 한참을 뛰놀아야 했고, 그 후엔 어김없이 덥고, 목마르고, 걷기 싫다며 칭얼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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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도 안되믄 어쩌겠는가. 안고 걸어야지. 이제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버린 꼬마쥐를 보다 한 손으로 들어안을 있었던 꼬꼬마쥐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이 때가 그립기도 하다. 이제는 엄마보다 더 쌩쌩하게 많이 걷고 돌아다닐 수 있는 꼬마쥐. 아이들 크는 거 정말 눈 깜빡할 사이이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판매소. 다행히 표는 있었다. 나는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탱고 포르테뇨’ 공연을 예매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또 다른 티켓. ‘어린이 박물관’ 할인권이었다. "이것도 하나 사둘까?" 그 순간의 결정이, 내 남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일정을 통째로 집어삼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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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웨이. 돌아오는 길에도 꼬마쥐는 덥고 힘들다고 칭얼거리기 시작했고, 하필 돈을 딱맞춰 들고 나간터라 동전까지 탈탈 털어 꼬마쥐에게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줄 수 있었다. 한 입만 달라해도 절대 주지 않는 꼬마쥐. 흥. 어차피 나도 아이스크림 안좋아한다 뭐. 어머님은 아이스크림이 싫다고 하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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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27: 어서 와, 어린이 박물관은 처음이지?>

‘어린이 박물관’은 쇼핑몰 안에 있었다. 이름은 박물관이지만, 실체는 키자니아의 열화판. 하지만 남아공 시골에서 문명과 격리되어 땅 파며 놀던 딸아이에게 그곳은 신세계였다. 녀석은 그야말로 정줄을 놓고 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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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운전사가 되어 운전대를 돌리고, 마트 직원이 되어 바코드를 찍고, 맥도날드 알바생이 되어 햄버거를 만들었다. 심지어 치과 의사가 되어 환자(인형)를 치료할 때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이 되어서인지 유독 즐거워 보였다. 하이라이트는 ‘막노동 체험’ 코너. 색색의 원반을 손수레에 실어 위층으로 올리면, 다른 아이들이 그걸 받아 다시 아래층으로 떨어뜨리는 무한 반복의 현장. 그 어린이용 챗바퀴 속에서 딸아이는 지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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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지켜보던 할아버지, 할머니는 안쓰러움이 폭발하셨다. 그리고 내게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내리셨다.

"내일, 한 번 더 오자. 개장부터 폐장까지 원 없이 놀게 해주자."

…아니 아빠...저는 생각이 조금 다른뎁쇼.

제 원이 생길 것 같은뎁쇼!!!!!!!!!!!!!!!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할아버지의 손주 사랑 앞에 나의 항변은 힘을 잃었다.

아빠가 정말 손녀에 대한 애정만으로 이렇게 나오시는건지, 아니면 그간 기르시며 애먹었던 것을 이렇게 날 골탕먹이며 복수하시는 건지 이젠 헷갈리려고 한다.




<Day 28: 레골레타 대신 박물관으로 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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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다음 날, 우리는 레골레타 묘지 대신 어린이 박물관으로 출근했다. 나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버스 운전 코너의 뒷좌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그 사이 딸아이는 또래 친구들을 사귀며 어제보다 더 열정적으로 놀았다.

이틀 연속 박물관을 휩쓸고도, 딸아이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런 녀석을 보며 나는 절규했다.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레골레타 묘지는 숙소 바로 옆인데 아직 가보지도 못했다고! 가보고 싶던 미술관이 한가득인데, 왜 나는 어린이 박물관만 이틀 연속으로 와야 하냐고!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이란, 내 계획이 아닌 아이의 행복을 따라가는 여정인 것을. 그렇게 나의 원대한 부에오스아이레스 문화 탐방 계획은, 어린이 박물관의 알록달록한 색채들 속으로 처참히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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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29: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아르헨티나의 일정을 정리해보면 대략 이러하다.


첫째날 부에노스 아이레스 도착하고, 엘 아테네오 서점 및 밤 산책을 나섰다.

둘째날은 심카드 충전하러 삼만리 후, 한인촌에 들러 점심식사를 하고 장보는 것 정도를 하고는 쉬었다. 사실 이 때 아버지의 컨디션이 안좋았더랬다. 그래서 숙소에서 쉬면서 하루를 보냈다.

셋째날은 오전에 나가서 탱고티켓을 사고, 오후에 꼬마쥐와 어린이 박물관에 갔다가(부모님은 쇼핑몰 구경하며 기념품 구입), 저녁에 탱고 공연을 봤다.

넷째날은 오전에 쉬다가 점심에 나가서 스테이크를 먹고 어린이 박물관 개장할 때 들어가서 폐장할 때 나왔다.


이럴 순 없다. 4박5일 간, 스테이크 한 번 먹고, 탱고 공연 본 게 다라니! 구글지도에 촘촘히 박혀있는 나의 초록별들이 울고 있단 말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하나, 혹은 두 개라도 나의 위시 리스트를 이루고자 했다.


하지만 내가 앓아누워버렸다. 남미여행 29일차. 뭘 잘못 먹은 건지, 그저 지쳐서 병이 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하루를 꼬박 침대와 한 몸이 되어 보내야 했다.

나의 원대했던 부에노스아이레스 박물관 투어와 산뗄모 벼룩시장 방문 계획은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부모님도 이참에 푹 쉬기로 하셨고, 지루해하는 딸아이를 돌보는 것은 온전히 남편의 몫이 되었다. 남편은 딸아이를 데리고 동네 마실을 나가 스타벅스에도 가고, 엘 아테네오 서점에도 다시 다녀왔다고 했다.

그렇게 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마지막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지나가 버렸다.


인생은 예측불허, 하여 그 의미를 갖는다.

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엉망진창이었기에,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니아니 근데, 어째 지금까지 남미 여행기를 정리하고있자니 다 엉망진창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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