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4 산티아고, 칠레
<어린이는 뛰논다>
간만에 상쾌한 아침이었다. 고산병의 악몽에서 벗어나 맞이한 산티아고의 아침.
오늘은 오롯이 딸아이를 위한 날이다.
우리는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어린이 공원(Bicentenario De La Infancia Park)'으로 향했다.
공원은 명성대로였다. 감각적인 디자인의 놀이기구들,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
꼬마쥐는 남아공 시골에서는 구경도 못 해본 신기한 놀이기구들 앞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늘이 부족해 볕에 달궈진 바닥이 뜨거웠지만, 아이의 즐거움 앞에 그런 것은 사소한 문제일 뿐이었다.
미끄럼틀과 그네같은 전통적인(?!)놀이기구도 있었지만, 각양의 소리가 나는 악기 같은 곳도 있었고 신기한 구조로 된 놀이공간도 있었다. 그간 고산지대를 지나며 혹시나 아플까봐 "조심해라, 뛰지 마라" 귀에 딱지가 앉게 잔소리만 했던 나였지만 오늘만큼은 마음껏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놀라고 한다.
예상치 못한 복병은 '물놀이 공간'이었다. 물놀이터가 있는 걸 알고 있었는데 왜 나는 여벌옷 한 장을 안가져 왔을까. "그냥 만져만 보는 거야!"라고 주의를 줬지만, 이는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길 바라는 것만큼이나 헛된 것이었다. 될리가 없잖아. 결국 딸아이는 온몸을 흠뻑 적시며 물놀이를 즐겼다. 포기하면 편하다.
젖은 옷은 칠레의 강력한 햇볕에 맡기기로 했다. 남아공에서도 겪어봐서 아는데 이 정도 볕이면 30분 안에 다 마를거다. 혹시라도 옷이 젖어 체온이 내려갈까봐 입술 색만 체크하며 마음껏 물놀이 하게 냅두다 추워하기 시작하길래 양지바른 곳에 겉옷을 덮어 앉혀 놓았다. 남아공에서 수영할 때 이렇게 하는 걸 봤거든... 아이들 놀다가 춥다하면 커다란 비치 타올로 번데기처럼 말아 볕아래 내놓으면 금세 따뜻해진다. ㅎㅎ
<어른은 먹는다>
신나게 논 뒤에는 잘 먹어야 한다. 점심은 한인촌의 '대장금'. 킹크랩을 기대했지만 철이 아니었고, 랍스터는 가격에 비해 아쉬움이 남았다. 살짝 긁힌 마음을 안고, 우리는 산티아고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산크리스토발 언덕으로 향했다.
잔뜩 놀고 피곤했던 꼬마쥐는 엄마가 업어줬으면 해서 필사적으로 눈을 감고 자는 척한다. 안 자는거 다 알고 있지만 귀여워서 업어준다. 그간 고산지대에서는 잘 업거나 안아주지도 못했었으니까.
부모님도 걸어도 걸어도 기분이 좋다며 즐거워하며 함께 산티아고를 누비신다. 7년이 지난 지금도 산티아고를 생각하면 행복해서 마음이 반짝이는 것만 같다.
푸니쿨라를 타기 위한 줄은 상상 이상으로 길었다. 뙤약볕 아래 한 시간을 기다려 마침내 올라선 언덕.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산티아고 시내를 내려다보니 기분은 좋았지만, 사실 특별할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곳에서 먹은 딸아이의 돈가스 도시락이 더 기억에 남는다. 소풍 나온 기분으로 룰루랄라.
산티아고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는, 내가 바득바득 우겨서 찾아간 '두리스시'였다. 남아공 내륙에 살며 회가 몹시 그리웠던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완벽했다. 사장님께 모든 것을 맡기자, 흑돔회와 해산물 덮밥, 매운탕과 각종 튀김이 차례로 나왔다. 입에서 살살 녹는 회 한 점에, 대장금에서 긁혔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토록 만족스러운 식사라니.
<아쉽지만 안녕>
숙소로 돌아오는 길, 가족들은 모두 똑같은 말을 했다. "여길 더 오래 잡았어야 했는데…." 힘들었던 고산의 기억이 선명할수록, 천국 같았던 산티아고에서의 시간은 더 짧게만 느껴졌다. 아쉬워서 더 좋았던, 그래서 더 오래 기억될 도시.
내일이면 우리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난다. 경제가 어렵다는데, 분위기가 흉흉할까봐 걱정이다. 남아공 거주민이 남미 치안을 걱정하는 아이러니를 되뇌며, 산티아고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