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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운 Oct 11. 2023

천국이 아니라 스위스 호수를 찾고 있습니다.

이번 꿈 이름을 짓는다면 나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라 지을래



12. 나는 스위스 호수에서 꿨던 오늘의 꿈 이름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라고 지을 생각이다.

이 꿈은 깨어나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커튼이 떨어졌기 때문에 이런 사진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운



여행을 떠나기 2주 전에 비행기 티켓을 끊었기에 숙소 또한 자리가 여의치 않았을 터. 그 탓에 우리는 짧은 일정에도 숙소를 옮겨 다녀야 했었다. 이 날도 어김없이 스위스의 딱 하루 남은 일정을 위해 어렵사리 숙소를 옮겼다. 여기에서 '어렵사리'란 우리가 이번에도 한 번에 숙소 위치를 찾지 못하여 애썼다는 말.


아쉽게도 이 새로운 숙박시설은


1) 커튼이 저절로 툭하면 떨어지기 일쑤였고,
2) 영국에서 급하게 산 어댑터는 시설과 맞지 않아 카운터에서 빌렸지만 충전율이 굉장히 낮았던 만큼


시설이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이런 불편한 상황을 달래줬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커튼이 떨어졌기 때문에 이런 사진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목적지는 피르스트가 아닌 융프라우. ©오운




오늘은 다시 한번 그린델발트를 찾는다. 목적지는 피르스트가 아닌 융프라우.


참, 생각해 보니 이 날도 참 버라이어티한 일들이 많았지.



1) 휴대폰 빌려줘 사건

우리는 융프라우에 가기 위해 '그린델발트 터미널역'에서 내려야 했지만, '그린델발트 역'에서 잘못 하차해 버렸다. 워낙 다양한 일들을 많이 겼었던 터라 놀라운 실수 감지 능력을 장착했던 우리는 잘못 내린 것을 거의 바로 알아챘지만 이미 기차문은 닫힌 후였다.


결국 30분을 길거리에서 버리게 되어 기분이 굉장히 언짢아진 채 다음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중국인이 우리에게 와 계속 휴대폰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카카오톡 음성통화가 아닌 이상 절대 통화 사용이 불가한 상황이었고, 이런 타지에서 휴대폰을 빌려주는 상황은 조금 위험하기에 우리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런데 우리의 답을 무시한 채 몇 번이고 휴대폰을 빌려달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심지어 처음부터 끝까지 영어도 아닌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자신의 모국어로 막무가내로 빌려 달라고 하는 모습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못 빌려준다고요."


'나도 네가 못 알아듣는 한국어로 이야기할 줄 알아.'라는 의미로 강하고 단호하게 말하며 더 이상 쳐다보지 않았더니 그제야 요구가 멈췄다.




어떻게든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는 게 인간의 숙명인가 보다. ©오운



저 때까지만 해도, 오늘은 잘 안풀리는 날인가 했는데 그런 고비를 잘 넘긴 일도 연달아 있었다.


2) 기차역에서 환승 마라톤 사건


다시 기차에 올라타 이번엔 제대로 가나 싶었는데, 이제는 기차를 잘못 탔다. 급한대로 승무원에게 물어보니 이 열차는 2개로 연결되어 있고, 우리는 앞쪽이 아니라 뒤쪽을 타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차간의 연결은 곧 끊어질 것이니 다른 역에서 뒤쪽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에게 '어느 역에서 내려야 하며, 내려서 오른쪽으로 뛰어야 하고, 여유 시간은 어느 정도 있을 것'이라 친절하게 설명해 준 승무원은 그 역이 되자 우리에게 지금 내려야 한다고 다시 설명해 주었다.


환승시간이 여유 있지는 않았기에 우리는 내리자마자 급하게 뛰었는데, 감사하게도 다른 직원들에게 공유해 준 것인지 마치 마라톤을 응원하는 것처럼 직원들이 열차에서 내려 우리를 향해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환승 열차에 도착한 우리에겐, 설명을 이미 들은 것처럼 보이는 승무원이 곧바로 탑승을 도와줘 무사히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었다는 아주 다행스러운 이야기.


과하게 의미부여를 하거나 거창하게 얘기하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지만, 인류애가 사라질 듯하면 다시 만들어져 어떻게든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는 게 인간의 숙명인가 보다.




유독 사랑스럽던 순간들을 많이 만났던 융프라우 정상이었다. ©오운




곤돌라로 아이거글레처에 도착한 후, 열차를 타고 융프라우를 향해 올라간다.


지금 사진을 다시 보니 상당히 날씨 운이 좋았나 보다. 이렇게 선명한 융프라우를 보는 경우가 많지 않다고 하는데 말이다. 사실 당시에는 생각보다 추운 기온과 고소공포증 때문에 경치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관광명소에 큰 관심이 없어 몇 초만 봐도 '다 봤다'라고 말하는 편이다 보니.. 융프라우가 기껏 이렇게 멋진 모습을 보여줬는데 내가 이런 반응을 보였으니, 융프라우가 감정이 있었다면 조금 머쓱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얼음 속에 갇힌 영화 <아이스 에이지>의 다람쥐 인형 앞에서 포즈를 취하면서 사진을 찍는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다 우리가 지나가자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는 외국인 노부부 관광객들과 전망대 매점에 쭈볏대며 쿠폰을 꺼내려는데 이미 신라면을 들고 대기하던 외국인 점원까지.


유독 사랑스럽던 순간들을 많이 만났던 융프라우 정상이었다.




오랜만에 너무 시원했다. ©오운



아 오랜만에 너무 시원했다. 분명 정상에서는 추워서 벌벌 떨었으면서, 자연 에어컨이 멀어지자 벌써 그리운 정상이었다.




정말 우리는 말 그대로 여행을 떠났다. ©오운


사실 오늘은 인터라켄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무엇을 하면 좋을까 계속 고민하다 새로운 도전을 해보기로 했다. 무작정 구글맵에 '수영'을 쳤고, 버스를 타고 무작정 인터라켄의 어느 호수로 향했다.


정말 우리는 말 그대로 여행을 떠났다. 당시에는 한국인들에게도 유명하지 않았던 곳인지라 한국인 후기는 전혀 보지 못했고, 구글맵에 수영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만 보고 곧장 그곳으로 떠난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무모하기도 했다. (정확히 우리가 이곳에 다녀온 지 1-2주 후에 한국의 어느 방송에 이곳이 나왔다.)


그런데 그 무모한 도전이 없었다면 내가 스위스를 이렇게까지 그리워했을까?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일상에 나도 한 명의 일원으로서 함께 있어보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오운




버스에 내려 이 호숫가로 오는 내내 심장이 벌렁거렸다. 나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직감 때문이었다. 내가 스위스에서 그토록 바란 것은 사실 융프라우도, 짜릿한 액티비티도, 멋진 산의 풍경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일상에 나도 한 명의 일원으로서 함께 있어보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이곳에는 그들의 일상뿐만 아니라, 푸른 산과 잔디,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는 호수까지. 마치 내가 원하는 대로 조합해 둔 미니어처의 풍경처럼 펼쳐져있었다.




내가 오랫동안 이 사진을 좋아할 거란 사실을 알았다. ©오운



이 장면만 봐도 내 머릿속엔 벌써 여러 영화가 스쳐 지나간다. 영화 <어바웃타임>에서 샤롯에게 반한 팀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을 보니, 나에게 비치발리볼은 '청춘들의 풋풋한 사랑'이란 의미인가 보다. (사실 영화에서는 배드민턴이었다)


물론 영화 <Call Me By Your Name>의 티모시 샬라메도 떠올랐는데 그 이유는 이 글의 제목 뒤에 넣어둔 사진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나는 위 사진을 찍을 때, 내가 오랫동안 이 사진을 좋아할 거란 사실을 알았다. 따뜻한 햇빛에 젖어든 노란빛의 잔디와 노란색 네트, 그리고 높은 나무들이 내가 사진을 찍을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사진에 조화롭게 담겨있다.

특히 운동하는 모습은 역동적인 일상 중 하나이다 보니, 사진에서도 그때의 움직임이 잘 보이는 것 같아서 마치 영상을 찍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백조와의 수영, 믿기지 않는 순간들의 연속이군. ©오운


이런 풍경에 취할 새라 얼른 수영복으로 환복 한 후, 물속에 들어갔다. 쌍둥이는 들고 온 피크닉 매트를 잔디에 깔고 누워 이곳을 사진으로 담았다.


물은 벌레들이 떠다니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빙하가 녹은 물이라 그런지 수영을 하기엔 많이 차가웠다. 갓 태어난 기린처럼 물속을 걸어 다니다 적응을 위해 몸을 조금씩 물속에 넣었는데, 갑자기 쌍둥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른쪽을 보니, 나에게 5 발자국 정도 떨어진 정도의 위치에 백조가 수영을 하고 있었다. 이런 풍경 속에서 내가 수영을 하고 있는 것도 놀라웠는데 백조와의 수영이라니 믿기지 않는 순간들의 연속이군.







그 친구들이 이곳에 살았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운



내가 다녔던 대학교 연못에는 오리가 2마리 살고 있다. 그 오리들이 사는 연못에 학기 초만 되면 풍덩 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장난으로 빠지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는데, 물이 깨끗하게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우슷개소리로 여기에 빠지면 온갖 질병에 다 걸릴 수 있을 거란 소문이 돌았는데..


백조와 함께 수영하고 있었던 그 순간에 왜 모교의 오리 2마리가 생각났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 친구들이 이곳에 살았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해가 저무니 산의 색이 변한다. ©오운




해가 저무니 산의 색이 변한다. 주황빛의 산과 맥주를 마시며 더 북적거리는 사람들.

이들에겐 오늘이 일상일지, 혹은 여행일지 모를 일이지만 이곳을 온전히 즐기는 방법은 이미 그들에게 익숙해 보인다. 아무리 즐기려고 노력해도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눈이 꽂혀있었던 나는 이곳을 완벽하게 즐겼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오늘 내가 적는 이 글이 미화가 된 추억은 아닌가 보다. ©오운


우리도 그들처럼 즐겨보자며 카페테리아에 앉아 치킨과 술을 시켰다. 너무 비싼 탓에 고작 메뉴는 하나밖에 시키지 못했지만 다행히 맛은 있다.


술은 마티니를 시켰다. 도수가 약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이곳에서 먹는 영상을 16분이나 찍은 걸 봐선 꽤 만족하며 먹었나 보다. 도수가 약하지 않아서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고..  영상에서 '나는 스위스에서 이곳이 제일 좋았다'라고 몇 번씩이나 말한 걸 봐선, 오늘 내가 적는 이 글이 미화가 된 추억은 아닌가 보다. 엊그제 삼겹살을 괜히 사서 모두 버리게 된 게 추억인가 아닌가 쌍둥이와 열심히 이야기도 나누고 있는데.. 아유 담배냄새와 벌레 때문에 오래 있지는 못하겠다. 일어나자.







그 장면이 음성과 함께 영상으로 기억에 담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오운



시간이 잘 맞아떨어졌는지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해가 완전히 저물려고 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쌍둥이는 몇 년 전 함께 스위스에 왔던 친구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날씨가 좋지 않았던 지난 스위스를 다시 회상하고 있었고, 나는 뒤편 풍경을 바라보며 새로운 스위스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버스정류장 옆에서 떠드는 아이들의 꺄르륵대는 웃음소리는 그 장면이 음성과 함께 영상 버전으로 기억에 담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영상으로 이 소리를 녹음했다. ©오운



숙소에 돌아와 잘 맞지도 않는 충전 어댑터를 이리저리 만지다 겨우 빨간불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했다. 내일이면 우리는 취리히로 떠난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종착지인 오스트리아까지, 우리에게 유럽에서 남은 시간이 이제 길지 않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여행이 끝나가는 게 이리 실감 나진 않았는데 벌써 마음이 헛헛하다.


숙소 창문 쪽 커튼이 하나 떨어진 탓에 밖의 풍경이 내 침대에서도 잘 보인다. 이곳은 별이 참 잘 보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 별들을 함께 나누기 위해 야간모드로 많이도 찍었는데 실물만큼 잘 담기지는 않는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에게 이 사진을 보내고 잠에 들려하는데, 종이 울린다. 문득 이 종소리가 이 날의 기억을 모두 담아줄 것 같아서 영상으로 이 소리를 녹음했다.






* 위 사진들은 모두 오운 (@daa_wooon) 개인 권한 저작물이며, 개인/상업적 이용을 금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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