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먼저 좋아한 거 아님
13. 각 도시들이 나를 꼬시는 방법은 참 다양했다.
런던은 선선한 날씨와 함께 유명한 관광명소로, 니스는 기막힌 다이빙 장면으로, 파리는 좋은 사람들과 낭만으로, 인터라켄/그린델발트는 믿을 수 없는 산과 호수의 색으로!
그중 취리히는 사실 말도 없이 조용한 타입이라 처음엔 눈길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 잘 보면 가만히 있는 애들은 자신의 매력이 워낙 커서 딱히 어필을 하지 않아도 됐던 아이였던 경우가 참 많다. 취리히가 딱 그런 애다.
낯익은 들판 위를 달린다. 스위스 도착 4일 만에 이 푸른 들판이 익숙하다는 표현에 잠식된다.
오늘은 스위스를 떠난다. 정확히는 이날 밤까지 스위스에 있으니, 내일 떠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려나?
우린 오스트리아로 가는 야간열차 예매에 어렵게 성공했다. 그리고 그 열차에 탑승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시작점인 취리히를 향해 가고 있다. 사실 야간열차 파업 소식도 간간이 들리고 있던 터라, 아직 우리가 언제까지 스위스에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에 거의 도착하자마자 한국으로 떠나야 하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야간열차를 못 타면…
어우, 뒷일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캐리어가 한 짐이던 우리는 취리히로 가는 기차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렸는데, 어떤 할머님이 자신의 맞은편에 자리가 있다고 눈치껏 알려주셨다. 덜컹거리는 기차 짐칸에 캐리어들을 넣고, 가방 지퍼 사이로 어렵게 자물쇠를 꺼내어 기둥과 고정시켜 놓으니 마주 보고 앉아있던 노부부가 우리를 귀엽게 쳐다보셨다.
내가 가장 자신 있는 것 중 하나가, 사람 좋은 미소였기 때문에 나도 답례로 미소 하나를 건네드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휴대폰을 보는 사람 하나 없이, 다들 책을 보고 있다. 그때 나도 한국에 가면 책 한 권씩은 들고 다녀야지 마음먹었던 것 같은데.. 다행히 실제로 한국에 돌아와 두어 번은 그렇게 다녔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정면을 보니 서로 손을 잡고 있었던 노부부.
그렇게 나는 오랜 꿈이 생겼다.
취리히 중앙역에 도착했다. 역내에 있는 짐보관 서비스를 이용한 후,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경유가 방문 목적의 전부였던 터라 취리히에 대한 정말 간단한 정보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글을 적을 때 그곳에서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움직였는지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편인데 이곳은 기억이.. 음.. 그래도 이때를 곰곰이 떠올려보자면..
머릿속이 멍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직진했었던 것 같다.
유럽의 여름을 떠올리면 무더위가 떠오르진 않았는데 역시 사람은 경험해야 안다고, 이곳도 땡볕의 연속이구나.
그새 J 계획형 성격이 발동했는지 이 더위를 피해 최소시간으로 갈 만한 곳을 검색해 봤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촬영지가 주변에 있다. 사실 명소기피자로서 그렇게 당기는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길거리에 서있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길을 떠났다.
목적지를 향해 10분 정도 걸었을 땐가. 아, 역시 나는 안 되겠다. 겨울에도 창문을 열고 자는데 이 더위를 참고 그곳에 가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늘을 급하게 찾고 보니 계단을 타고 내려가 강변 옆으로 쉴 만한 휴식 공간이 있다.
우리도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아 바지 밑단을 걷고 물을 첨벙거렸다. 기분이 좋은지 쌍둥이의 말투가 바뀌었다. 아래에는 엄청 큰 물고기들과 오리들이 사람 사이를 지나간다. 그저 쉬려고 눈에 보인 이곳에 온 것치곤 여기 때문에 취리히에 온 사람처럼 카메라를 든 손이 멈출 줄을 모른다.
이곳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냐면 고작 8시간 밖에 취리히에 있었으면서 2번이나 이곳을 다시 찾았다.
여행 중에, 심지어 에어컨도 없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멍 때리기란 쉽지 않았는데 그 대단한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이 공간을 여러분들과 공유하고 싶어 방금 전 구글맵을 열심히 뒤졌지만 정확한 명칭을 찾을 수 없어 슬플 따름이다.
오르막을 잠시 올라갔더니 우리가 찾던 린덴호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올라오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곳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라고 한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흔적이 있고, 오랜 시간 취리히 시민들의 주요 여가활동이 이뤄진 곳도 바로 이곳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몰랐을 땐, 그저 취리히 구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 공간이라 생각했었다. 다행히 이 사실을 알고 이곳을 방문한 덕분에,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에 왠지 모를 무게감과 상상력을 녹여 도심을 지켜볼 수 있었다.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난간에 앉아 책을 읽던 사람들. 지금도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와 역사를 린덴호프에 남기고 있었다. 내가 남긴 이야기는 '덥다' 밖에 없었던 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이 장면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는데 키보드에 올라간 내 손이 한참을 안 움직인다. 이제야 왜 내가 아까부터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지 알겠다.
취리히는 정말 아-무런 기대도 없이 방문했던 곳이라, 심지어는 카메라도 짐칸에 넣어두려고 했었다. 그런데 다른 곳에 비교하더라도 단시간에 멋진 사진들을 워낙 많이 남겼던 만큼 이 글에서 사진의 수량을 도저히 줄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작정 걷다가 찍은 사진들이 전부다 보니, 할 말은 없고 사진은 많고.. 이런 부조화를 겪고 있어 속이 답답했나 보다. 이 글을 적는데 나도 모르게 맥주를 깠다.
내 글을 보고 취리히를 방문할 사람들이 있을까 싶지만, 에피소드가 재미없다고 느끼는 건 취리히 때문이 아니라 아무 생각도 없이 취리히를 찾은 나 때문 일 것이니 섣부른 편견은 잠시 접어주시길 바란다.
1년 전인가, 친한 동생이 인플루언서의 인스타그램에 유럽여행 사진을 보고 캡처해서 나에게 보내준 적이 있다. 한눈에 봐도 유럽의 차분하고 우아한 매력이 사진에 모두 담겨있어, 이 멋진 곳이 어딘지 물어봤더니 바로 이곳 '취리히'라고 했다.
놀랍게도 의도치는 않았으나, 위 사진이 그때 내가 받았던 사진의 구도와 장소가 거의 일치하다. '취리히'란 답을 받았음에도 내 인생에서 취리히를 찾을 거란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일이 또 이렇게 풀려버렸다. 인생에서 절대는 없다는 걸 여기에서 또 느낀다.
그래도 그 덕에 취리히라는 도시에 대한 거부감은 많이 사라졌던 것 같다. 자료조사도 안 한 내가 이런 말을 조금 어색하지만, 나는 편견이 생기면 그걸 무너뜨리는 게 쉽지가 않다. 취리히는 다른 도시에 비해 어떤 콘텐츠나 멋진 풍경으로 유명세를 가지고 있지 않다 보니, '노잼도시'라고만 생각했는데.. 동생이 보내줬던 사진이 '콘텐츠는 없지만 그럼에도 멋진 도시‘라는 타이틀로 취리히를 찾게 되었던 계기가 되었다.
직접 이 도시에 와보니 '그럼에도'는 이제 빼도 되겠다. 그 자체로도 멋졌던 취리히!
또 다른 명소인 오페라하우스에 가기 위해 걷다 애매해진 시간대를 보고 고민했다. 여기 주변에 소시지 맛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애매하게 배고프더라도 지금 갈 수밖에..!
다행히 웨이팅은 없었지만 이렇게 더운 날, 야외 테라스 존과 연결된 모든 통창문들이 열려있었다. 우리가 가게로 들어가자 주문을 서브웨이식으로 받던 가게주인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는데, 장난기 많던 그 점원들의 모습에 '경계+즐거움'의 감정이 교차했었다. 혹시나 이렇게 경계를 풀었다가 인종차별을 당해 상처를 받을까 봐 무서웠던 것이다.
사실 소시지 종류로 어떤 것을 줄까 했을 때, 이름이 익숙한 스모크를 골랐는데.. 음~ 역시 그냥 그렇다! 1년도 더 지난 이야기인데 어떻게 자세히 기억할 수 있냐 물으신다면, 소시지를 먹을 때 찍은 영상을 봤다. 우리가 영상에서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다.
"여기는 얼마나 맛집이 없었으면.."
끼니를 해결하고 가게에서 나오자, 아까부터 찾아 헤맸던 오페라하우스에 다시 가보기로 한다. 도착했더니 이곳은 장기간 휴무였고, 허무함에 '잘~ 보고 갑니다.' 하며 뒤돌아섰는데 진짜 잘 보고 갈 곳은 따로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 길 건너편에는 취리히호수가 위치해 있었다.
뭐야... 왜 스위스에는 이런 호수가 있는 게 익숙한 거냐고..
너무 더운 날씨 탓에 얇은 물방울들이 산책로 사이에 뿌려지고 있었다. 푸른 강 주변에는 여기저기 사람들이 편하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벤치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 그리고 현실적으로 더위에 찌들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사람들까지. 현실과 이상을 넘나드는 멋진 유토피아였다.
이렇게 멋진 풍경을 눈앞에 두고 계속 든 생각은 머쓱하게도 '이렇게 더운 날 왜 밖에서 책을 읽지?'에 대한 물음이었지만 동시에 이런 곳이 생활 반경에 있다면 내 인생이 또 다른 방식으로 풀렸을까 괜히 궁금해졌다.
언젠가 나에게 외국에 나가서 살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이런 다양한 생활방식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곳으로 가서 내 인생이 어떻게 풀려나갈지 적극적으로 임해볼래.
1년 전에 다녀온 스위스를 기억하면 신기하게도 취리히가 떠오른다. 특별히 한 것도 없고, 본 것도 없는데 그 도시의 잔잔함과 평화로움이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듯하다.
물론 다시 한번 스위스를 찾는다 해도 인터라켄이나 그린델발트와 같은 멋진 풍경을 앞세운 지역들을 선택할게 분명하지만, 취리히를 다시 찾을 것 또한 확실한 걸 봐선 이 도시가 뿜어내는 무언가가 있는가 보다.
스위스 취리히의 색감은 바로 이 사진에 모두 담겨있는 것 같다. 차분한데, 역동적이야.
그로스뮌스터 교회 근처에서 내가 유럽에서 꼭 담고 싶었던 장면을 담을 수 있었다. 바로 길거리 공연이다. 흔들린 초점이 그때 이 장면을 마주친 나의 감정을 대변해 준다.
다음날 방문한 오스트리아 글에서 더 자세하게 풀어볼 예정이지만, 내 20대 초중반은 클래식 공연을 제외하곤 이야기할 수 없다. 나는 클래식을 전공하지도, 심지어 관심이 많던 사람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클래식 공연과 유달리 인연이 깊었다. 그 인연의 끈을 억지로 끊고 싶지는 않았던지, 지금도 가끔 내가 아는 클래식 음악이 들리면 집에 와서 따로 찾아서 듣곤 한다.
우선 이 장면을 꼭 담고 싶었던 거창한 이유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지만, 조금 솔직하게 말하자면 여행에 떠나기 전 봤던 공연 사진이 너무 멋있었던 게 이유였다. 나도 이 장면을 비슷하게라도 담아봐야지 했던 게 바로 오늘이었던 모양이다.
취리히의 해가 서서히 저문다. 이렇게 2022년 스위스 여행이 마무리되었다.
나의 스위스 여행 후기는 최근 글에서 스위스를 예찬했던 내용과는 조금 상반될지도 모르겠다. 스위스는 기대를 한 만큼은 좋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은 것보단 좋았다. 이번 스위스 여행은 정말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저 오랫동안 바라보았던 그 아름다운 스위스의 사진들을 보고 여기에 왔다. 그러니 내가 스위스에서 기대했던 전부는 푸른 산과 넓은 들판일 수 밖에. 그리고 실제로 마주했을 때는 '아 내가 기대한 그대로구나'라는 느낌이었다. 사실 그 이상의 감동은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스위스 호수에서 수영을 즐길 거라곤, 유람선을 타면서 푸른 물색을 마주할 거라곤, 취리히를 또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부분들은 내가 스위스를 잊을 수 없게 만든 장본인이 되었다.
무엇이든 기대하지 말자는 뜻은 아니다. 어떤 부분이 아쉬웠다면, 다른 부분에서는 분명 내 기대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지도 모른다. 아쉬운 부분만에 매몰되어 다른 아름다운 부분들을 보지 못하는 것은 너무 속상한 일이지 않나?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그런 부분들을 깨달았다.
이제 이 시리즈의 마지막 여정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오늘 밤 오스트리아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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