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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운 Nov 10. 2022

비행기 탑승구에서 캐리어가 고장 났다.

제1 차 위기 : 캐리어의 고장


2. 고장 난 캐리어와 출국

두려움은 현실이 됐다.



12. JULY. 2022


인터넷 없이 베트남 경유 ©오운



 이번 유럽여행은 베트남을 경유한다. 사실 베트남은 처음이라, *레이오버로 잠깐의 여유를 즐겨보기로 했다. 대신 유심은 없다. 와이파이에만 의지하여 어떻게든 한나절을 보내야 한다. 아직까진 순조롭다. 여유 있게 공항에 도착했고, 큰 문제없이 비행기만 타면 베트남일 것이다. 이 완벽한 상황에 무슨 일이 발생할리가 없다.

(*레이오버_경유지에서 24시간 미만 체류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의 첫 번째 위기는 인천공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  


이 당황스러운 사건은 한국을 떠나기도 전에 일어났다. 바로 기내용 캐리어 지퍼가 비행기 탑승 직전에 고장 난 것이다. 심지어 내 손으로 직접 고장 냈으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이 캐리어를 들고 베트남을 누비고, 또 무사히 영국까지 가야 했다. 열지도 닫지도 못하는 캐리어 속의 짐들이 밖으로 빠져나오지는 않았지만 확실한 건 캐리어가 아주 살짝 열려있다는 사실이다. 짐들에게 숨구멍을 만들어주며, 베트남과 영국을 실시간으로 보여줄 생각에 설레기 시작했.. 으면 참 좋았겠지만, 그저 캐리어에게 어떻게든 무사히 함께 도착해야 한다는 전우애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혹여 캐리어가 활짝 열릴 최악의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이륙 직전까지 캐리어를 구매하거나 수선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결국 영국까지는 어떻게든 저 상태로 들고 가야만 했다.


 잠시 후 비행기가 이륙하자 불안과 두려움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만의 여행인가. 오랜만에 먹는 기내식은 꿀맛이었고, 내리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비행을 즐겼다.


 우리는 베트남에 내리자마자 캐리어를 갓 태어난 아기 마냥 소중히 품 속에 안아 옮기기 시작했다. 10kg나 되는 캐리어를 끌지 않고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뭐 하나 싶을 것 같은데, 그걸 들고 다니는 사람이 바로 나라니. 우린 서둘러 공항 내에 있는 짐 보관센터로 향해 캐리어를 보관하는 방법을 택했다. 우리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센터 사람들은 휙휙 짐을 옮겼는데 (아마 우리 눈에만 거칠어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조심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이런 점까지 세세하게 챙기기는 쉬운 일이 아닐 테니 그저 마음을 비우고 센터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짙은 색만으로도 베트남에 온 게 실감 난다 ©오운




 우리는 곧장 버스를 타고 호안끼엠 호수가 있는 중심가로 향했다. 신기하게도 버스기사 분이 버스 안을 돌아다니며 탑승객에게 다가가 직접 버스 티켓의 결제까지 도맡아 했고, 누가 새롭게 탔는지를 구분하는 기사 아저씨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버스에서 내려 미리 찾아둔 식당을 향해 가려던 때였다.


“저 혹시 주변에 구경할만한 곳 어디 없을까요?”


 우리와 함께 내린 남자분이었다. 우리에게 주변 식당이나 관광지를 추천해 줄 수 있냐 말을 걸었다. 사실 오토바이만 지나가도 호들갑 떠는 모습이 누가 봐도 영락없는 한국인이었으니 우리가 한국인인 것을 알아본 게 신기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와이파이가 없는 길거리에서는 우리도 도움을 줄 수 없는 같은 처지라는 걸 그분은 몰랐겠지. 우리는 한국에서 미리 찾아둔 관광지를 겨우 기억나는 대로 말하곤, 서로의 여행에 행운을 빌며 길을 떠났다.




콩카페에 도착한 지 15분 만에 더위를 피해 마사지샵으로 이동했다 ©오운



 우리는 ‘꽌 안 응온’ 식당에 이어, 코코넛 커피가 유명한 ‘콩카페’에서 연이어 휴식을 취했다. 유심 없이 이 정도면 꽤나 잘 돌아다니는 것이 여행 어쩌면 내 적성에 맞는 것 아닐까? 하지만 적성에 맞는 여행가인 나도 에어컨이 없었던 콩카페에서는 별 수 없었다. 커피를 반쯤 허겁지겁 먹었을 때쯤, 주변에 있는 마사지샵을 서둘러 예약했다. 그리고 예약시간을 15분 후로 결정하곤 곧장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마사지샵에는 에어컨이 있었고, 시원한 아로마 마사지를 받는 도중에 계속 베트남어로 ‘감사합니다’를 연신 유도하는 마사지 안마사들과 함께 1시간 30분을 보냈다. 사실 머리를 고정하는 수건이 너무 꽉 끼여있어 두통을 유발하는 수준이었는데, 취업과 이사 문제 그리고 파업에 대한 걱정으로 꽉 차 있던 머릿속이 ‘수건 때문에 아프다’로 가득 채워져서 오히려 편안히 서비스를 받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 순간이 여행에서 몸과 마음이 가장 편한 순간이란 것을 잘 알고 있어서인지 그 고통스러운 순간을 즐기기까지 했다. 그래도 아픈 건 아프더이다.




호안끼엠 호수는 어두워질수록 밝아졌다 ©오운



 마사지샵에서 나와 5분 정도 걸으니 붉은 노을이 담겨있는 호안끼엠 호수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의 주변이 점점 어두워질수록, 빨간 다리의 불빛은 더 강해졌다. 어느덧 노을과 다리의 아름다움의 정도가 서로의 접점에서 만나 조화를 이뤘고, 그제야 첫날의 감정들을 나열하며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기 시작했다.


 행복, 설렘, 불안, 그리고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했던 아무 생각이 없는 순간들.


 노을 구경을 마치고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 미리 캡처해 둔 지도 사진으로 버스 정류장을 찾았지만 전혀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닌 지 30분이 될 때쯤, 극적으로 찾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40분이 넘도록 버스가 오지 않았다. 심지어 버스 표지판에는 우리가 타야 할 버스 번호가 적혀있지도 않았다! 우리와 같은 표정인 사람들이 정류장에 점점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모두가 공항으로 향하는 한국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앞 가게로 달려가 해당 버스가 여기에 선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였고, 그분을 통해 모두가 초조하지만 확신에 찬 얼굴로 버스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분을 더 기다렸을 때 즈음, 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이 정말 존버는 성공한다는 것 아닐까? 버스에 타자마자 기쁜 마음으로 와이파이를 연결했다. 그러자 어떤 알림이 뜨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용할 항공사에서 온 메일이었다.



‘런던 히드로 공항으로 향하는 당신의 항공편이 1시간 지연될 예정입니다’.




나무와 물은 가까이일수록 더 선명하게 서로를 비춰준다 ©오운




2)


 결국 우리는 위기를 피하지 못했구나. 위기는 지금부터였다. 7번의 비행 중, 2번째 차례에서 연착이란 위기를 어김없이 맞아버린 것이다.


 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낮에 봤던 공항과 모습이 사뭇 다르다. 급한 대로 우리가 타야 하는 항공사를 찾아 기존 비행기 티켓으로 탑승할 수 있는지를 알아봐야겠다. 그런데 왜 줄이 공항 출입구까지 서있지? 하고 봤더니 우리 항공사다. 참 아찔하기 짝이 없군. 20분째 기다리던 중, 눈치싸움으로 옆 직원에게 빠르게 물어봤고 우선 1차 해결이다. 자, 그리고 우리의 귀여운 캐리어를 찾으러 가야 한다. 그런데 공항을 잘못 온 거 아닐까? 주변 식당 직원에게 물어도 짐보관센터의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나 이대로 베트남에 머물러야 하나.. 이런 카오스를 겪다 보니 비행기 탑승 시간의 지연 ‘덕분에’ 우리가 무사히 런던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강하게 남았다. 결국은 한 층 아래에 있던 짐보관센터에서 무사히 여전히 조금 열려있는 캐리어를 찾을 수 있었지만!


 허겁지겁 탑승구에 도착하여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사과의 의미로 항공사에서 물을 제공했다. 방송으로 선물을 준비했다고 해서, 디저트인가 했지만 물도 감지덕지다. 지연 예정 시간보다 20분을 더 기다린 무렵쯤인가, 다행히 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짐들도 여전히 캐리어 속에서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너무 당연한 상황이 감사하게 느껴지는 이번 여행.



3)


 비행기에 탑승했다. 나는 약간의 폐쇄공포증이 있는 편이라 비행기를 오래 타는 것을 무서워하는 편이다. 따라서 앞으로 13시간 동안 나의 비행 파트너(= 옆좌석 승객)가 될 사람을 잘 만나는 것이 중요했는데 하필 통로 쪽에 매우 건장한(을 많이 넘어선) 할아버지가 앉으셨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짐을 바닥에 두어 통로로 나갈 수 있는 공간을 모두 막아버렸고.. 본인의 좌석 자리를 넘어서 내 자리의 1/3을 더 차지하시고는 곧바로 잠들어 버렸다. 덕분에 이륙하지도 않았는데 속이 울렁거렸다. 우리 사이에 담요를 넣어봤지만 더 다정한 부녀관계처럼 보일 뿐이었다. 하필이면 이 날따라 비행기는 만석이었고, 엄청난 고민 끝에 승무원을 불러 자리를 바꿀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하지만 승무원은 알아보겠다는 말만 하고선 한동안 답이 없었고, 이륙을 하고 안정권에 접어 들어서야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딱 2자리가 남아있어요. 대신 아기가 바로 앞자리에 있어서 시끄러울 수 있어요”.

    “네, 바꾸겠습니다. 감사해요”.




 종교는 없지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신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싶었다. 덕분에 나는 13시간 동안 설레는 마음으로 기내식을 먹고, 선잠을 자고, 음악을 들으며 영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예상 밖의 위기가 많았지만, 이 정도면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적어도 여행 내내 예상 밖의 위기가 계속될지 몰랐던 그때까지는 말이다.






* 위 사진들은 모두 오운 (@daa_wooon) 개인 권한 저작물이며, 개인/상업적 이용을 금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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