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 다툼 해외출장 - 런던 편
5. “그냥 지금까지 찍었던 사진 다 지워”
MBTI가 하나도 맞지 않는 우리 쌍둥이에게 타워브릿지는 멋있는 관광명소가 아니라 싸움하기엔 너무 넓은, 그런 공간일 뿐이었다.
잠에서 깼다. 창문 사이로 은은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걸 봐선 날이 밝았나 보다. 늦잠이 아니길 빌며 기지개를 켰다.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걷자 지금까지 내가 봐온 우리 집 풍경이 아니다. 내가 영국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난 순간이다. 쌍둥이 자매는 일어나자마자 에어비앤비 거실로 나갔나 보다. 허겁지겁 방으로 돌아와 거실이 너무 멋지다며 호스트가 아직 방에 있을 때, 거실 구경을 하자고 재촉한다.
어젯밤, 구글링을 통해 집 앞에 있는 브런치 카페가 엄청난 맛집이란 사실을 알아냈다. 오늘은 느긋하게 나가 브런치를 즐겨보려고 한다. 한시라도 런던을 더 즐기기 위해 허겁지겁 씻다가 욕조에 무릎을 씨-게 박았다. ‘와, 이거 진짜 세게 박았다’라고 생각한 동시에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나 여행 2주는 더 남았는데, 여기서 절뚝거리는 게 맞는 건가?’
우선 이 아픔을 꾹 참고, 절뚝거리며 브런치 카페로 향해보기로 했다. 카페에는 벌써 웨이팅이 한 줄이다. 기다리다 보니, 사람들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1) “저 사진 좀 찍어주시겠어요?”
대가족이 다 함께 여행에 온 듯한 외국인 무리가 나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보통 한국인들이 나에게 사진을 부탁했는데 외국 분이 부탁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미 외국에도 한국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데에 진심이란 걸 아는 걸까? 나도 사진에 한 진심하는 사람으로서 기쁜 마음으로 사진을 찍어주기 시작했다. 아마 내가 절뚝거리며 사진을 찍어주는 모습을 보고선 사람들은 ‘아차’ 하지 않았을까.
2) “이 집 유명한 맛집인가요?”
웨이팅을 하기 위해 선 줄에서 우리 바로 뒤에 서있던 외국 분이 물어보았다. ‘우리도 여행객이라 먹어보진 않았지만 구글앱에 높은 평점이더라’ 말해주니 그는 웨이팅을 이어갔다.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다니! 한국인들이 맛집에 진심인걸 아는 건가?
사실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정작 우리가 중간에 웨이팅을 포기했다. 맛집에 진심이기도 했지만 성격이 급한 것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한국인이었다.
그렇게 조금 거리를 걷다 보니 피자집이 눈에 띈다. 피크닉을 하고 싶었고, 목적지인 그린파크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선 우리에게 최선의 선택지였다. 쌍둥이는 마트에서 콜라를 사 오기로 하고, 나는 영화에서 보던 런더너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따라 하고 싶은 마음에 카푸치노 한잔을 시켜 피자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잘못된 선택이었다) 15분 이상을 기다리면서 피자집에는 꽤 많은 손님들이 다녀갔는데 그곳에서 만나는 게 익숙하다는 듯이 손님들끼리 반갑게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토익시험을 칠 때처럼 영어 듣기에 귀를 쫑긋 세워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동안 살짝 수그러들었던 인류애가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피자가 나왔다. 한 손에는 피자와 커피를, 다른 한 손에는 영상을 찍기 위해 휴대폰을 들고 아슬아슬하게 걷는 모습이 딱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나온 앤디 삭스의 모습처럼 보였으면 좋으련만, 사실은 의지의 한국인 그 자체였다. 공원에 도착하자 역시나 많은 비둘기들이 우리를 맞아주었는데, 조류 공포증이 있는 우리 둘은 최대한 비둘기를 피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 피크닉매트(겸 비치타월)를 펼쳤다. 나는 사실 느끼한 걸 좋아하지도, 잘 먹지도 못해서 평소에 피자를 찾지는 않는 편인데 그러다 보니 피자를 딱 한 입 문 순간부터 알았다. 커피가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심지어 난 뜨거운 커피를 샀다..
그래도 모든 것이 좋았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도, 근위병 행진을 기다리며 주변을 살피는 일도. 날씨가 너무 좋은 영국 사진을 지인들에게 보냈더니 그들의 반응은 어땠으며, 지금까지의 런던 여행은 어떤지 의견을 나눠보는 것도. 이 자체에 행복을 찾고 있어서인지 우리는 오늘 아무 계획이 없다. 아니 사실은 오늘이 아니라 2주간 진행될 유럽여행 전체의 계획이 딱히 없었다. 그래서 계획형인 나는 매 순간 조급해했는데, 쌍둥이는 무릉도원에 온 것처럼 뭐든 다 흘러가는 대로 좋다는 입장이라 더 막막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근위병 행진에 늦어버렸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와 악기 소리가 들리자 우리는 피자를 싸서 허겁지겁 버킹엄 궁전으로 향했다. 이미 늦었다는 걸 직감했을 땐, 궁전 앞은 사람들로 이미 가득 차 우리가 들어갈 공간이란 건 없었다. 심지어 서로를 놓쳐버릴 수도 있겠다는 인파에 사진과 영상은 둘째치고 적절한 자리를 찾는 데에 집중했다.
그 와중에 애기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사실은 인파가 너무 많아 목마가 최선이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목마를 태워주는 아빠들의 모습이 참 많이 보여서, 그 아기들의 기억 속엔 이 행진이 너무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거란 생각에 입꼬리는 계속 올라갔다.
근위병은 영국 드라마 ‘셜록’에 한 에피소드에서 다뤄진 모습으로만 접했는데 실제로 그들의 딱 맞춰진 행진을 보고 있자니 다시 한번 국왕이 있는 나라구나를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행진 속에서, 그리고 이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지켜보면서 왕권에 대한 그들의 애정과 자부심도 잘 느껴진 덕에, 개인적으로는 행진 보는 것 이상의 감정이 벅차올랐다.
행진이 끝나고, 갈 곳을 잃은 우리는 메이페어로 자리를 옮겼다. 1년도 더 된 여행이어서인지, 아니면 정말 그때도 여길 왜 왔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기자기한 건물들 사이에서 ‘그래서 여기에 왜 우리가’라는 생각을 했던 것만 기억에 남아있다. 아, 식당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우리 여행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준 것도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전날 인종차별로 잃어버린 인류애를 계속 채워 넣고 있었나 보다.
런던 투어 버스를 발견하자 이 버스를 탈까 했더니 생각보다 너무 비쌌다. 영국의 상징인 2층 버스를 타고 싶어 사실 버스정류장에서 기웃기웃거렸지만 2층 버스 목적지로 딱히 갈 곳이 없어서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버로우 마켓을 가기로 했다. 빈티지 액세서리를 사고 싶어서 찾았던 곳이었는데, 아쉽게도 그곳엔 식료품들과 수많은 비둘기들 밖에는 찾을 수 없었다. (아직도 왜 버로우 마켓에 액세서리를 찾지 못했는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수확은 있었다. 바로 납작 복숭아를 발견한 것이다. 전날 마트에서 딱복을 찾아 숙소에서 먹었을 때는 너무 맛이 없어서 납작 복숭아를 찾기만을 고대했었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그리고 과일이 너무 반짝거려서 마치 모형을 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수준이었다.
버로우 마켓 근처에 타워브리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조금 멘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타워브리지는 야경을 볼 생각이었지 낮에 방문할 생각은 딱히 없었는데, 지금 당장 타워브리지를 보지 않으면 할 것이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야경을 포기하고 타워브리지로 향한 우리였다.
타워브리지에서는 인생샷을 건지고야 말겠다는 게 우리의 목표였는데, 아쉽게도 쌍둥이는 사진에는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구도가 이상하거나, 내 포즈가 이상하거나, 머리 스타일이 바람에 이상해져도 딱히 말하지 않고 그냥 찍었는데 그러다 보니 내가 만족하는 사진을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을 10분 넘게 대치하고 있다가 결국 우리는 터져버렸다. 분노에 쌓인 나는 이렇게 저렇게 찍어달라고 말했지만, 이런 분위기에 위축되어 있었던 쌍둥이도 기어코 화가 난 모양이다.
“야 지금까지 나 찍어준 것도 다 삭제해 그냥”
이 말을 들으니 정신이 확 들었다. 진짜로 삭제해 버려도 분명 후회할걸 잘 알았고, 아직 영국의 태양이 지기엔 시간이 꽤 남아있었기에 화를 푸는 게 우선이었다. 쌍둥이에게 나의 상황을 이해시키려 했지만 ISTP에게 감정적 호소란 사치였다. 결국 쌍둥이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을 대입하며 상황을 이해시킨 후에야 겨우 이 상황이 종료되었다. 그리곤 내 사진을 다시 찍어줬지만 결국 뒷모습 사진만 겨우 건진 나였다.
타워브릿지를 거닐다, 워낙 관광명소에 큰 흥미가 없던 우리였지만 그래도 런던아이는 한번 가까이에서 봐야 하지 않겠냐며 버스 정류장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고대하던 2층 버스를 탈 수 있었다. 2층 버스에는 매니큐어를 바르는 사람이 있어서 사실 머리가 조금 지끈거리기도 했는데 다행히 이곳에 오기 전에 내가 봤던 영상이 무심결에 떠올랐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 사람이 영화에 나오는 아주 귀여운 주인공이라고 생각을 하면 그 모든 행동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 정말이네
하지만 이 영화가 곧 끝날 예정인가 보다. 하필 몇 정거장을 지나치지 않았는데 금세 종점에 도착한 것이다. 다행히 그 종점과 우리가 바랬던 목적지가 그리 멀지 않았지만.
런던아이를 봤을 때는 사실 큰 감흥이 없었다. 관람차를 몇 번 타보니 그 공포감을 더 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 때문인지 런던아이의 거대함이나 낭만에 대해 큰 생각이 없었던 터다. 그래서 한참 동안 그 아래에서 흐르는 템즈강의 빛나는 윤슬만을 바라보다 빅벤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 일정은 거의 다 끝나갔다. 웨스트앤드에서 뮤지컬을 볼까 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너무 늦어질 것을 감안해 간단한 저녁식사를 하곤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파스타와 샐러드를 시켜 밥을 먹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런던 식당에서 밥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워낙 밥에 관심이 없고, 내 몸이 고효율적이라 밥을 안 먹어도 잘만 걸어 다닌다) 옆 테이블과 음식이 잠깐 바뀌긴 했지만 맥주 한잔과 파스타라니 충분히 훌륭한 식사였다.
물론 술을 좋아하는 나로선 바에 가지 못한 게 한이 됐지만, 그건 다음에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런던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 이번 여행에선 조금 참아보기로 한다.
식당에서 나왔더니 바로 앞에서 어떤 연주가 진행 중이다. 영상으로 담기 바빴던 나에게 점점 시선이 좁혀온다. 돈을 내라는 것이었다. 현금이 없었던 우리는 급하게 그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지만,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던 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자리를 옮겼음에도 벌렁거리는 심장은 멈출 줄을 몰랐다.
트라팔가 광장에서의 마지막 시선을 급하게 카메라에 담고, 숙소에 돌아왔다. 시간은 저녁 8시, 그리고 해는 아직 떠있었다. 사 왔던 납작 복숭아를 급하게 씻어, 침대에 앉아 한 입 베어 물었다. 지금까지 상상해 왔던 맛과 거의 흡사했다. 당도가 높고 적당히 물러서 베어물 때마다 복숭아물이 한가득 나왔다. 런던에서 먹은 납작 복숭아가 가장 맛있을지는 그때만 해도 상상을 못 했지만, 복숭아를 먹자 그제야 벌렁거리던 심장이 조금 안심이 됐던 것 같다.
허겁지겁 영국 노을을 보기 위해 숙소에서 나와 산책을 하며, 가까운 마트에 갔다. 모든 마트에는 꽃을 파는 칸이 따로 있었는데 워낙 꽃을 좋아하다 보니 하나를 살까 했지만, 내일 이곳 런던을 떠나 프랑스 니스로 향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런던은 사실 많은 기대를 했지만, 그 기대와는 너무 달랐다.
상상했던 흐린 날씨보다 맑은 날씨를 많이 만났고, 젠틀한 사람들만 있는 곳이 아니라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엄청난 관광 명소를 봤음에도 나는 사실 큰 감흥을 못 느꼈었다.
그런데 그래서 다시 한번 런던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여전히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런던을 최고의 도시로 꼽는 경우가 많았고, 정중하고 젠틀한 인상을 도시에서 많이 받아왔다는 인상을 사진과 이야기로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방문했던 런던과는 또 다른 런던의 진짜 모습을 내가 아직 느끼지 못했다는 점은 다음 런던 여행을 기다려지게 만들고, 또 나만 봤던 런던의 모습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이번 런던 여행이 더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하고 혼자 되뇌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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