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아파트에 사는지가 명함이 되어버린 세상
아파트의 가치를 평가하는 요소로 교통, 교육, 개발 호재 등과 함께 필수적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브랜드’다. 부동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만, 지역 시세를 이끄는 대장주 아파트를 살펴볼 때 유명한 브랜드인 경우가 대부분일 정도다. 즉, 아파트의 가치와 급을 매길 때 브랜드가 중요한 척도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파트 브랜드의 역사가 깊은 것도 아니다. 부동산 시장에서 브랜드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이제 20년 갓 넘긴 정도다. 이전까지는 압구정 현대아파트, 도곡동 삼성아파트처럼 지역명에 건설사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러다가 1999년 롯데건설이 처음으로 ‘롯데캐슬’이란 브랜드를 출시했고, 그다음 해에 삼성물산 ‘래미안’과 대림산업 ‘e-편한세상’이 등장했다. 이에 질세라 현대건설, GS건설, 대우건설, 포스코건설 등이 앞다투어 브랜드를 출시했고, 중견 건설사들도 그 뒤를 따르면서 본격적인 경쟁 체재가 형성된 것이다.
물론 아파트 브랜드 내에서도 등급은 나뉜다. 시공능력평가 10위 안에 드는 건설사를 흔히 1군 건설사, 10대 건설사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브랜드를 향한 선호도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그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분양시장의 결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정성껏 만든) 그래프를 먼저 확인해보자.
그래프에서 나타났듯이 10대 건설사와 이 외 건설사의 격차는 꽤 크다. 물론 지역, 시기, 단지 규모 등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둘의 성적표는 뚜렷하게 차이가 난다. 2019년 동안의 결과를 놓고 보았을 때 청약 평균 경쟁률은 3배 수준이며, 1순위 마감률 역시 30% 이상 차이가 난다. 전국 청약 상위 경쟁률을 기록한 10개 단지 중 8개가 10대 건설사일 정도다. (아래 표 참고) 이처럼 국내 부동산 시장에서 10대 건설사, 그리고 그들이 내놓는 브랜드 아파트의 인기는 압도적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브랜드 쏠림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사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우리나라는 집을 사는(live) 곳이 아니라 사는(buy) 곳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의식주의 일부가 아닌 큰돈을 만질 수 있는 투자처로 생각하다 보니 그 가치를 높여주는 브랜드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 영향력이 어느 정도냐면 나란히 위치한 아파트라 하더라도 인기 높은 브랜드 아파트의 시세가 더 높게 형성될 정도다. 즉, 아파트를 투자의 대상으로 보는 상황에서 브랜드가 돈이 되다 보니 그 영향력이 점점 커지는 것이다.
이처럼 확실한 브랜드를 갖춘 아파트의 경우 시장 분위기가 좋을 땐 화끈하게 오르고 안 좋을 때는 방어적으로 내리면서 지역 대장주로 자리 잡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례들이 쌓이면서 브랜드는 안정적인 투자처의 위상을 차지하게 된 셈이다. 우리네 인생에서 억 단위의 돈을 이렇게 쉽게 벌 기회가 흔치 않다 보니 브랜드의 가치는 높아지면 높아졌지 절대 내려오질 않는다.
물론 브랜드 선호 현상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이왕이면 더 좋은 것을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은 것 아니겠나. 또한, 유명 브랜드 아파트가 가지고 있는 장점 또한 분명 존재한다. 대기업들이 나서는 만큼 기술력이 상대적으로 더 좋으며, 평면 설계 및 IoT 등 서비스에 더 많은 투자를 한다. (그렇지만 사실 매년 주택 하자 분쟁을 살펴보면 10대 건설사가 번갈아 가면서 1위를 차지한다) 어린이집, 노인정, 놀이터 등 부대시설 또한 빵빵하게 넣어주는 편이며, (지역에 따라) 더 좋은 마감재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부분들은 당연히 환영할 만한 부분이다. 다만 투기의 요건으로 브랜드가 활약하는 점은 충분히 우려되는 상황이니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브랜드 쏠림 현상은 앞으로도 진정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선 브랜드 파워가 약해지려면 아파트의 비중이 줄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특성상 매우 어려운 일이다. 좁은 땅덩어리, 그중 70%를 차지하는 산, 국민 5명 중 2명이 서울∙수도권에 사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파트만큼 효율적인 주거 형태가 없다. 하락론자들이 주구장창 외치는 것처럼 인구수가 급격하게 줄어든다면 모를까 당장의 흐름으로 보면 향후 몇십 년간 아파트의 인기는 끄떡없을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다가 본인이 소유한 브랜드가 자신의 가치를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한국인 특성도 무시할 수 없다. 명품 브랜드의 쇼핑백을 몇만 원 주고 사는 나라에서 억 단위의 재화인 아파트의 브랜드에 둔감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자신의 자식들에게 임대주택 사는 아이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가르치고, 학교 배정을 다르게 해달라며 민원을 넣는 등의 혐오를 줄이는 것부터 먼저 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처럼 아파트 브랜드에 대한 생각을 줄줄 써보았다. 사실 한 아파트에 대해 얘기할 때 평면 설계가 어떠하고 단지 위치가 어떠하다는 내용을 말하는 대신 브랜드를 얘기하는 것 만으로 얼추 설명이 되는 것은 맞다. 브랜드만으로 ‘이 브랜드의 아파트니까 기본적으로 이 정도는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브랜드 계급화 현상이 약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것으로 생각한다. 그전에 부동산 시장의 투자 성격이 옅어지고, 단독 주택의 인기가 높아지고, 지방에 질 좋은 일자리가 생기고, 아파트의 브랜드가 자신의 브랜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먼저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