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보일 May 09. 2020

동정이라는 감정에 대하여

제목이 지나치게 거창하네 ㅎ;;

한 TV 프로그램의 몸이 아픈 아이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보다 울었다. 그러다 눈물이 뚝 그쳤다. 나 왜 울지. 그럴 만한 사연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눈물짓던 내게 묻고 싶었다. 왜 우세요? 입안에만 맴도는 말을 건넬 사람이 없어 눈물 콧물도 닦지 않고 허공을 바라봤다. 왜 그 시점에 내 주변 사람들의 눈빛이 떠오르던지. 그저 내 감정을 명확히 해두고 싶었다.

엄마가 보기엔 이랬겠지 쟤가 미쳤나

아직도 눈에 선하다. 철부지 코찔찔이 어린 내게 모두들 잘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고마웠고 내 처지를 어찌 그리 잘 이해해주나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됐다. 이제 막 중학교 가는 딸아이 교복값이 없어 절절매던 어미에게 돈 30만 원 빌려주지 않던 사람들이 그리 말했다는 걸, 다독이던 눈빛이 싸구려 연민이라는 걸 말이다.


역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불행이 당신의 다행'인 것을 알기에, 감히 나를 불쌍히 여겨줄 것을 알기에 마음껏 내 불행을 이야기했다. 어떤 이는 마음을 내어주고 어떤 이는 물질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감히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려 했다. 차라리 실질적인 도움을 주면 줬지. 그게 예의이자 그 사람의 인생을 존중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들 알겠지만 마음이 마음대로 되면 마음이겠는가. '7번 방의 선물'을 보면서는 울지 않았지만(사실 그렁그렁은 했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보며 오열하던 나의 마음을 보고는 알았다. 저 일이 내 일 같으면 부르지 않았던 콧물까지 나오는구나.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 같아서 눈물이 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동정이었다. (내게는 동정이 나쁜 어감이었는데) 


나는 아버지도 없고 몸이 아프지도 않다. 나의 눈물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웃고 견디는 부자(父子)가 대단해서 혹은 잘되기를 바라서'에 그쳐야 한다. '에휴, 나보다 더 힘든데 난 이겨내야지'에 나아가는 순간 그 값싼 눈빛들과 다를 바가 없다. 내 눈에 어떨지 몰라도 분명 어느 면에서 나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겠구나 한다. 그리고 나의 동정을 산 작은 한쪽 면을 눈물로 응원한다.

같이 잘 먹고 잘 삽시다

나는 아직 나의 불행을 이용한다. 예전처럼 악에 받친 마음은 아니다. 나는, 나만은 '너도 사는데 나도 살아야지'가 되어주고 싶다. 감히 나를 불쌍히 여겨도 좋다. 뭐, 응원해주면 더 좋고! 

작가의 이전글 직장에서 딴청 피우는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