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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보일 Feb 02. 2023

내 삶이 전보다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들

내가 가진 것들을 음미해 보세요 생각보다 제자리걸음이 아닙니다

증거 1. 친구들과 밥을 먹었을 때 가슴 졸이며 선결제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내 잔고가 버텨줄까 하던 마음에 내 체크카드님은 대부분 응답해 주었다. 그러나 가끔 체크카드의 거부 의사에 나는 얼굴을 붉힐 때가 있었다. 친구들에게 잔고가 부족해서 결제를 못한다는 말을 꺼내며 달아올랐던 내 얼굴보다 더 뜨거운 내 마음이 너무 싫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당당히 체크카드를 부려먹는다. 가끔 내킬 때면 사줄 때도 있다!


다음엔 당당히 사줄 나를 기대해!


증거 2. 집에 딸기가 많다. 그것도 크기도 크고 맛도 너무 좋고 예쁘게 생긴 딸기가 많다. 트럭에서 할인해야 만 살 수 있던 딸기가 아니라 마트에서 파는 왕딸기다. 이제는 밖에서 딸기 먹을 기회가 생겨도 아등바등 먹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증거 3. 샐러드를 사 먹는다. 어린 시절 못 먹었던 고기를 마음껏 먹으려는 통에 채소는 늘 뒷전이었지만, 지금은 건강을 위해 또 필요에 의해 샐러드를 사 먹는다. 심지어 맛있다. (고기보다는 아니지만)


증거 4. (그리고 계속 먹을 거 얘기지만) 사과를 베어 먹을 수 있다. 덧니는 십수 년간 나의 콤플렉스였다. 웃을 때 서로 자기주장하는 윗니 아랫니들이 얼마나 싫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게 교정은 래퍼들이 자신의 부와 힙함을 자랑하는 그릴즈 같은 거였다. 취직을 하고 나서 돈이 나올 구멍이 생기자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이 교정이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요즘은 가지런히 웃으며 그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사과를 많이 먹으면서 생각했다. '사과가 왜 맛있지?' 아삭, 하며 베어 먹을 수 있어서 그렇다. 더 이상 치아에 끼지도, 잇몸에서 피가 나지도 않는다.


요즘 내 행복의 지표


증거 4. 서귀포 바다의 윤슬이 예쁘다. 2-3년 전만 해도 나는 서귀포의 바다보다 제주시의 해수욕장을 더 좋아했다. 하얀 모래 위로 '에메랄드빛'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만한 제주시의 해수욕장은 참으로 경이로웠다. 물론 지금도 아주 화려하고 아름답다는데 이견이 없다. 그에 비해 서귀포의 바다는 시퍼렇기만 해 보였다. 거친 돌바닥 위에 깊고 차갑게 생긴 것이 영 마뜩잖았다. 그러다 언젠가, 날이 아주 좋았던 정오에, 그 시퍼런 물결 위로 일렁이는 햇빛을 보았다. '윤슬'이라는 이름도 알게 되었다. 이름도 곱지.


증거 4-1. 차가 없던 시절에 제주시의 해수욕장은 무척이나 가기 까다로웠다. 버스를 타고 2시간쯤은 가야 하니까. 그래서 더 갖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내가 사는 서귀포 바다가 좋다. 시퍼런 모습을 하다가도 반짝이는 그 얼굴을 보자면 가끔 내 삶을 돌아보기도 한다.


외적인 반짝임은 잃고 있으나 다른 반짝임을 얻고 있습니다


증거 5. 다른 사람의 차를 얻어 타는 것이 미안하지 않다. 태워주는 게 당연하다는 건 아니고. 차가 없던 시절의 타인의 차는 내게 접근금지구역 같은 거였다. '네까짓 게 감히 내 비싼 차를?'이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은 자격지심의 시절이랄까. 지금 내게는 절반의 할부가 남은 차가 있다. 아직 운전을 잘하지 못하지만, 언젠가 그들을 당연히 태워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미안하지 않게 됐다.


증거 6. 지극히 생산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이고 배설물 같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인정한다. 나는 싫든 좋든 노인이 될 때까지 글을 쓸 것이며, 글쓰기는 나의 동태눈을 빛나게 하는 몇 안 되는 존재란 것을. 경제적인 생산성은 '아직' 0에 수렴한다. 하지만 먹고사는 일이 아닌 이상, 내게는 100에서 0이 되는 것보다야 0에서 1이 되는 것이 더 기쁠 것이다.


증거 7. 스스로에게 조금 너그러워졌다. 예를 들자면 소설만 좋아한다는 걸 스스로 인정한다. 최근에 소설 <원더보이>를 읽었다. 거기 바보와 모범생, 천재의 책 읽기 방법이 나온다. 바보는 아는 것만 보고, 모범생은 모르는 것도 보고, 천재는 그 너머의 것을 본다는 게다. 그래서 나는 그냥 바보 하기로 했다. 나는 소설만 잘 보인다.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나만의 배경과 인물도, 간혹 멋진 문장을 발견할 때면 '우와!' 하는 그 경험도 참 좋다. 그러니까 굳이 철학, 경제, 자기 계발에 아등바등하지 않기로 했다. 좋아하는 것만 하기에도 아까운 시간들이니 말이다.


눈물이 주룩 납니다


증거 8. 나는 꿈꾸고 있다. 요즘 같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뚱딴지같은 소리 같다. 그렇지만 앞으로의 나는 언젠가 동화 작가가 될 수도 있고, 좋아하는 풍경 사진을 찍으며 여행할 수도 있고, 결혼해서 백년해로할 수도 있고, 내돈내산의 집을 내돈내산으로 꾸밀 수도 있다. 


증거 9. 다른 사람이 아닌 과거의 나와 비교한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이 아닌 내가 가진 것, 가지게 된 것, 가질 것에 집중한다. 바로 지금처럼!


증거 10. 증거 1~9를 읽으면 겨우 이까짓 걸로 삶이 나아지냐고 비난할 미래의 우울한 나와 싸워서 이겨낼 자신이 있다. 나는 여전히 가지지 못한 것이나 가지지 못할 것이 있을 것이다. 아주 많이 있어도 상관없다. 다 가지지 못해도, 그럭저럭 제자리걸음만 아니라는 지금의 확신만 있다면 그걸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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