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일기>. 롤랑 바르트
마망이 살아 있던 동안 내내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 동안 내내) 나는 그녀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그게 나의 노이로제였다.
나의 애도는 말하자면 노이로제가 아닌 단 하나 나의 부분이다. 이건 어쩌면 마망이 떠나가면서, 마지막 선물처럼, 나의 가장 나쁜 부분, 나의 노이로제를 함께 가져가버렸기 때문인지 모른다.
애도일기, 롤랑 바르트
작년 봄, 나의 시간은 어수선했다. 스무 살 이후 처음으로 긴 휴식이 주어졌지만,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몰라 허둥대기만 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 나의 모습은 품고 있던 커다란 풍선이 펑하고 터져버려서, 놀라고 허전한 마음에 울음이 터진 아이와 같았다. 부산스럽게 흔들리던 나를 잡아준 것은 ‘요가’였고, 우연히 여행에서 접한 수업을 계기로 얼마간 합정에 있는 센터에서 수련을 이어간 적이 있다. 그때 내게 인요가를 처음 알려준 선생님이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애도에 끝이 있나요?”
느닷없이 그날의 질문이 신나게 달리는 성산대교 위에서 오늘 내게 쏟아지는 햇살처럼 다시 던져졌다. 그때 “끝은 없겠죠”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럼 나는 아직도 애도 중인 걸까? 되묻고 나니, 가슴속에서 하나의 답이 떠올랐다.
아니, ‘애도의 시간’은 끝났지.
애도는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일. 나는 이제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죽음은 불멸의 이별이기 때문에 더없이 사무치는 것이다. 슬픔이 낭만적일 만큼 아무리 절절해도, 결국엔 남겨진 삶의 힘이 더 강렬하기에 절절함도 바닥을 친다. 물론 마지막으로 본 엄마의 얼굴이 생각날 때면 여전히 사무친다. 하지만 슬픔에 갇혀 함몰되어 있지 않는다. 나는 이제 나로서 살아간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집 근처 천에는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다복이와 함께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이들의 자잘한 웃음을 바라보고 있자면, 모녀의 산책이 눈에 띈다. 그렇다. 내게 없는 그것, 예전에는 누렸으나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다시는 누릴 수 없는 경험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그것은 엄마와의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다.
한때 거리에서 사이좋은 모녀를 보면 눈물이 났다. 그렇게 그들의 시간이 부럽고 덩그러니 서 있는 내가 애처로웠다. 그 길에 서서 통곡하던 나에게 내 삶은 없었다. 그저 엄마를 잃은 ‘나’만 존재했다. 이제는 길 위에서 그렇게 우는 일이 없다. 그저 빙그레 웃으며 나와 엄마가 보낸 시간을 추억한다. 그리고 걷던 길을 그저 다시 걸어갈 뿐이다.
멈추어 서서 통곡하는 시간이 애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 삶에서 엄마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간은 끝났다. 애도가 끝난 후에는 그리움과 애정이 남는다. 롤랑 바르트는 안타깝게도 애도의 시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생을 끝냈다. 내가 그의 <애도일기>를 줄을 그어가며 읽었던 때도 엄마를 보낸 직후 1년째 되던 가을이었으니, 그의 일기가 구구절절 얼마나 내 안에서 바스러졌을까.
나의 애도는 길었다. 5년이 넘는 시간이었고, 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빛바랜 롤랑의 일기를 다시 꺼내 볼 수 있게 되었다. 삶에서 하나의 시간대가 종결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마치 연극의 한 서막이 끝나고 장막이 드리워지는 것처럼. 장막 뒤의 무대는 다음 장을 위해 준비하는 스텝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있다. 내가 살아가는 ‘지금’은 그 장막 뒤의 무대 같다. 다음 장은 어떤 서사를 그리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