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이 개인의 창작물임은 틀림이 없다. 작가는 자기가 경험한 것을 소화하여 자기 나름대로 독특한 세계를 보여 주는 작품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의 경험에는 그가 학습한 것도 있고 체험한 것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받은 것도 있으니 순전히 그만의 것이라고만 단정할 수도 없다. 작가에겐 수많은 기억의 창고가 있다. 그 창고에는 수천 년에 걸친 집단의 영광과 상처, 고난과 투쟁의 역사적 DNA가 면면히 녹아 있다. 강자뿐만 아니라 약자들의 수난과 아픔까지 아로새겨져 있다. 작가에게는 그 기억의 창고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어 세상에 들려주고자 하는 의지의 목소리가 있다. 그 목소리로 표현되어 나온 것이 예술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작품에는 그가 바라보는 인간과 세계의 이미지가 녹아 있게 마련이다.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공감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작가의 의도대로 공감하든 아니면 정반대로 이해하든 작품이 공감이나 비판을 받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 이미지가 존재하고 있기에 그런 평가를 하는 것이라고 밖에 볼수 없다. 그 이미지의 근원에는 무의식이 있다. 의식의 밑바탕에 자리 잡은 무의식은 잠재되어 있지만 의식과 늘 붙어 다닌다. 친구가 되기도 하고 적이 되기도 한다. 무의식은 의식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잠재의식이란 이름으로 인간 심리의 심층에 자리하다 어느 순간 폭발한다. 인간 심리와 뗄 수 없는 기묘한 존재다.
의식과 무의식의 균형과 조화가 가장 높은 사람들이 예술가들이다. 반면 가장 깨지기 쉬운 사람들 역시 예술가들이다. 예술은 창작 활동이기에 고통을 수반한다. 고통스러우나 몰입에 빠져들면 고통 또한 잊어 버린다. 마치 무언가에 몰두하면 배고픈 것도 잊고 시간 가는 줄 모르듯이 말이다. 이때는 의식과 무의식이 하나가 되어 문제 해결을 위해 전력투구하게 된다.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신바람이 난다. 창조적인 작품과 발명이 이 순간 이루어진다.
그러나 의식과 무의식이 분리되면 신경증과 히스테리에 빠지게 된다. 예술가들이 신경증 증세가 심해지거나 정신병이 생기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균형이 파괴되어 무의식이 의식을 집어삼키기 때문이다. 의식의 문턱이 너무 낮으면 무의식이 침식해 버려 괴물이 된다. 이럴 때 자기 분열 증세가 심해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되는데 자기만 모른다. 이 둘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에도 의식과 무의식이 존재한다. 의식의 세계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세계라면 무의식의 세계는 충동적이고 직관적인 세계이다. 그 곳은 선과 악의 구분마저 모호한 혼돈(카오스)의 세계이다. 예를 들면 꿈의 세계가 그것에 가깝다. 무의식의 목소리가 꿈이다. 의식의 겉껍질 속에는 신화, 종교, 예술의 속 알맹이가 녹아 있다. 바로 집단 무의식의 원형(archtype)이다. 개인의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이 혼융되어 있는 세계가 그곳이다. 집단과 인류는 무의식의 바다에서 놀고 자고, 창조하고 파괴한다.
창작하는 예술가는 시대사조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가 역시 시공간을 사는 역사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연히 역사적 사건과 상처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하기 마련이다. 이를 자기 작품에 반영해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로 끌어올리는 공감을 줄 때 그 작품은 인류 전체의 유산이 된다. 고전이 된다.
가을이 저물어 간다. 매년 이때 쯤이면 각종 전시회가 즐비하다. 행복은 미래에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평생 자식을 위해, 그리고 미래의 왕국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살지만 그 왕국은 미래에 절대 오지 않는다. 현재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