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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여자 Oct 12. 2022

한가로운 오전 일상

퇴직하길 정말 잘했다.

 지난주 우중 캠핑을 다녀온 후 아이들이 감기에 걸렸다. 이번 주는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겠군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불멍도 중독이다. 흡사 담배 니코틴 같은 어떤 무언가가 불길 속에서 같이 피어오르고 있는 건 아닐는지. 그 시간을 자꾸 원하게 된다.


 월요일은 한글날을 대체한 휴무일로 2022년의 마지막 황금연휴였다. 주변 가족들은 미리 여행 계획을 짜 놓고 이 날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집을 떠나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럴 때 보면 계획성 없는 내 성격이 참 마음에 든다. 주로 캠핑 전일이나 그 며칠 전쯤 상황을 보면서 최단거리의 자리를 찾아 떠난다.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최소 1개월 전 사전 예약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다만 인기 있는 캠핑지는 빠른 선점이 필수인데 나는 해당되지 않는다.  

 

 아이가 기침을 시작하고 나서는 즐겁게 놀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이 한가득이었다. 반면 예약을 하지 않았기에 번거롭게 취소를 하지 않아도 되고 환불 규정에 따른 취소 수수료를 내지 않아도 돼서 내 선택에 안도했다.


 아이는 생각보다 많이 힘들어했다. 정점에 달하자 기침을 이기지 못해 얼마 먹지 못한 물까지 다 게워내었다. 아쉬움은커녕 오늘 아침 훌훌 털고 일어나 학교로 향하는 아이 뒷모습이 어찌나 대견하고 예쁘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바깥 아침 기온이 7도로 뚝 떨어졌다. 경량 패딩을 꺼내 하나씩 입히고 뜨신 물로 보온병을 채워 차례로 하나씩 가방에 넣어 주고 배웅을 하고 돌아서니 어지럽혀진 집이 눈에 들어온다. 평소 같으면 10분만 더 쉴까 하는 마음에 침대로 들어가는데 옴짝달싹 못하고 맥 빠져 있던 아이가 기운을 차리고 학교를 가는 모습을 보니 나도 추운 날씨가 대수롭지 않다. 분명 초겨울 날씨인데 마음은 봄 햇살보다 따뜻한 이른 여름의 온기로 꽉 찼다.


 몸의 체온도 올려본다. 부지런히 머리카락이며 이리저리 나부끼는 먼지들을 로봇청소기 안으로 밀어 넣기 위해 바닥에 잡동사니들을 모조리 치워준다. 로봇 청소기를 사용하고 나서 청소하는 시간이 단축됐다. 평소 같으면 느릿느릿 천천히 움직이며 주워 담았을 텐데 로봇보다 한 템포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삼키면 안 될 물건들은 로봇이 바닥을 휩쓸기 전에 재빠르게 치워줘야 한다. 로봇도 잘못 먹으면 탈이 난다. 적색 불이 들어오면 인간의 손길이 필요해진다. 로봇은 혼자서 뱉어 내 질 못한다. 요즘 자꾸 왼쪽 휠이 고장 났다는 에러가 뜬다. 주인은 오른쪽 발목이 고장 났는데 너마저 아프면 안 된다고 쓰다듬어 보지만 빨간 불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신경을 예민하게 긁는다. 산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말썽인지 모르겠다. 말썽장이가 말썽을 부리는 건 그러려니 하지만 모범생이 말썽 부리면 이 애가 왜 이러나 싶은 마음이 번뜩 드는 것처럼 자기 일을 알아서 척척 해내던 로봇이 자꾸 에러 메시지를 보내니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전 날 저녁 냉동실에 꺼내 았더니 크로와상 생지가 볼록하게 부풀었다. 오븐을 180도로 10분간 예열을 해주니 오븐 주변으로 온기가 돈다. 마치 좌훈기처럼 나를 꽉 붙들려한다. 예열된 오븐에 부풀어 오른 생지를 넣고 170도에 15분을 돌렸다. 고소한 버터향이 온 집안에 퍼진다.


 창 밖으로 가을 햇살이 스민다. 노트북 자리로 새어 들어온 햇살 한 줌이 눈을 지그시 감고 가을의 냄새를 맡도록 이끈다. 노릇노릇 잘 익은 크로와상을 쟁반에 담고 작은 종지에 딸기잼을 덜어냈다. 네스프레소 에센자 미니 전원 버튼을 켠다. 작은 사이즈의 앙증맞은 화이트색 커피머신은 사용할 때마다 웃음 짓게 한다.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온전히 나를 위한 첫 선물이었다. 마트에 가면 원두 코너를 항상 살핀다. 할인하길래 한 번 먹어볼까 하고서는 네스프레소와 호환되는 캡슐을 산 적이 있다. 투명 케이스에 담긴 캡슐의 개수를 눈으로 스윽 확인하며 하나를 집어 든다. 예열된 기계 속에 넣어주며 조만간 케이스 가득 채워줄 캡슐은 어떤 걸로 살까 잠시 생각했다. 뜨거운 물줄기가 캡슐 속의 원두를 적시고 고소한 향과 함께 컵에 담긴다. 가느다란 실 줄기 같은 검은 물이 컵 속으로 천천히 모아진다. 답답한 속도라 느껴지기 직전 컵 가까이 얼굴을 갖다 댄다. 허연 연기 속에 피어나는 원두 향은 좋아하는 애인이 뿌리고 나온 향수 같다. 거실 테이블에 앉아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창 밖을 바라본다. 여유로움에 흠뻑 미소가 지어진다.


시간을 듬뿍 얻은 나는 이 순간 누구보다 행복하다.

퇴직하길 정말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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