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세르빌리스

네버랜드에 관한 생태학적 보고서

by 이인숙 insouk lee

봄기운이 활짝 피다 못해 그냥 건너뛰고 여름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오월의 어느 날, 눈을 뜬 A는 축복처럼 쏟아지는 햇살에 마음껏 기지개를 폈다. 사월 내내 오락가락하는 비와 함께 못내 떠나기 싫어 옷자락 잡고 늘어지는 겨울의 끝자락이 오는 봄을 밀어내더니 갑작스레 닥친 초여름 날씨에 옷장사들은 봄옷을 못 팔아 재고만 쌓인다고 투덜댔다. 그러는 사이 꽃이 잠깐 피었나 했더니 어느새 온 산과 들이 초록으로 덮여 네버랜드는 마음껏 싱그러운 기운을 뽐내고 있었다. 거리로 나온 A는 이런 아름다운 나라에 오게 된 자신의 행운에 감사했다.

눈부시게 밝은 오월의 햇살이 가득한 거리를 걷다보면 늘씬한 다리를 허벅지까지 드러낸 아리따운 여성들의 생기발랄한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네버랜드는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나라가 아닌가. 혹자는 이 나라가 워낙 의학기술이 좋아서 미인을 양산해 낸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기심에서 나온 악의적인 소문일 뿐, A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세계에 자랑할 만한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나라, 물결치듯 굽이치는 아름다운 산과 강, 하늘의 은총인 양 온 누리에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 이런 나라의 여성들이 아름답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A같은 손님은 그저 감사할 일이었다. 햇빛 찬란한 거리에는 여유가 넘쳤다. 짧은 시간에 이룬 네버랜드의 놀라운 번영은 많은 나라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아직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많은 나라들이 배우고자 하는 본이 된 나라, 아랍의 부자들이나 지닐 만한 고가의 소위 명품을 네버랜드 거리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다. 국민들의 지도자에 대한 사랑도 유난스러워 다른 나라 지도자들의 시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A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아름다운 봄날의 거리를 거니는 행복감을 마음껏 누렸다. 네버랜드의 번영을 보여주는 수도 모노폴리스 거리의 고층 건물들, 위를 올려다보다가 유리벽이 되쏘는 강렬한 햇살에 A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네버랜드 유인원연구소>는 수도 모노폴리스 외곽 거대한 자연동물원 안에 있었다. 이 연구소가 유명하게 된 것은 유인원들의 독특한 생태 때문이었다. 집단생활을 하는 이 유인원들은 상당한 지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우두머리가 무리를 지배하는 방식은 꽤나 폭력적이었다. 친위대까지 두고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가차없이 폭력을 가했으며 먹이의 분배에도 상당한 불이익을 주었다. 유인원들은 폭력적인 우두머리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무리와 반항하는 무리로 뚜렷이 구분되었다. 복종하는 무리들은 폭력이 무서워 마지못해 복종하는 게 아니라 힘에 복종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 특이했다. 반항하는 무리들은 수가 적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친위대의 과격한 폭력에 당할 때가 많았다. 같은 종 안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행동 양식의 차이가 A의 흥미를 끌었다. 타고난 성향 때문인지 경험의 차이인지 하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다. 오늘도 친위대의 폭력에 상처 입은 유인원이 몇 마리 있었다.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늘 유쾌했고 만사에 긍정적이었다. A가 유인원들의 생태를 이해하지 못해 머리를 싸매고 있으면, 아, 그놈들은 제 생긴 대로 노는 거니까 고민할 필요 없어요. 말 안 듣는 놈들은 때려잡으면 돼요, 간단하다니까. A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면, 농담이야, 농담,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면서 클클거렸다. 이들의 농담에 익숙해지면서 A도 네버랜드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본국에서 미리 네버랜드 말을 공부하고 온 것이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고 동료들과 어울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동료들과 함께 갖는 회식과 그 후에 가는 노래방이라는 곳도 처음엔 상당히 낯설었다. 그러나 흥이 많은 이 나라 사람들의 기질이 여실히 드러나는 자리라는 걸 알게 되면서 A도 이를 즐기게 되었다. 워낙 춤과 노래를 사랑하는 국민들이 아닌가.

아름다운 젊은 여성들이 떼 지어 나와서 사람을 유혹하는 몸짓으로 춤과 노래를 하거나 만화를 찢고 나온 것처럼 예쁘장하게 잘 생긴 젊은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춤을 추며 노래 부르는 광경은 네버랜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잘 생긴 외모와 춤이 여러 나라 젊은이들의 동경의 대상이라는 사실도 네버랜드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한 달쯤 지났을까, A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밤마다 수도 모노폴리스를 비롯한 네버랜드 곳곳에 모여서 통곡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A는 제 귀를 의심했다. 축복 받은 나라 네버랜드, 부와 번영의 상징 네버랜드, 이런 나라에서 사람들이 모여 통곡할 일이 뭐가 있을까. 그 말을 전해준 사람은 연구소 직원이 아니라 A가 옷을 맡기던 동네 세탁소 주인이었다.

- 나도 눈으로 본 건 아니고 친구한테 들은 얘기예요.

- 거기가 어딘데요?

- 그건 모르겠는데…… 그 친구도 어디서 들었다고 하던데요.

A는 더 알고 싶었지만 세탁소 주인도 더 이상 아는 게 없었다.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모든 국민이 행복을 노래하는 나라 네버랜드, 본국에서는 구경하기도 힘든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방송에서 날마다 보여줬고, 채널마다 국민들이 얼마나 지도자를 사랑하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매일 방영되었다. 혹여 지도자가 눈물을 보이면 국민들이 모두 마음 아파하며 지도자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온 힘을 기울였고, 혹 지도자의 심기가 불편하면 전 국민이 좌불안석이었다. 참으로 정이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어려운 사정에 처한 사람도 방송에만 나오면 순식간에 온정의 물결이 쏟아져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또한 춤과 노래, 오락은 채널을 돌릴 때마다 쏟아져 나와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이 나라 사람들의 생활을 잘 보여주었다. 화면 어디에도 통곡할 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세탁소 주인이 잘못 들은 것 같았다. 그래도 마음에 걸려 A는 평소 친절하게 도와주던 연구소 동료에게 물어봤다.


- 무슨 그런 이상한 소릴…… 헛소문이에요, 헛소문.

동료는 껄껄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A는 안심이 되었다. 그러면 그렇지, 이 행복한 나라에서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있나.

안심이 된 A는 연구실을 나와 유인원들이 생활하는 자연동물원으로 갔다. 전부터 유인원들 중 일부가 영 기운이 없어 보여 걱정되었다. 친위대가 소수 유인원들에게 걸핏하면 폭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A도 눈여겨보고 있었다. 오늘도 한바탕 당한 것 같았다. A는 몸집도 작고 눈이 처져 어딘가 슬퍼 보이는 유인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무슨 말이라도 할 것 같은 그의 표정이 안쓰러웠다. 이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할까. 왜 이들은 다른 유인원들처럼 우두머리에게 복종하지 않을까. 복종하는 무리들은 충실하게 우두머리에게 먹이를 갖다 바쳤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았다. 반항하는 무리들도 이들처럼 복종한다면 달콤한 열매를 맛볼 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모노폴리스의 밤은 활기가 넘쳤다. 낮과는 다른 활기였다. 중심가의 불빛은 화려하기 그지없었고, 밤늦은 시간에도 사람들은 어디서 그렇게 쏟아져 나오는지 거리에 가득했다. 이들이 이룬 부와 번영은 휘황한 불빛이 넘실거리는 밤거리에도 차고 넘쳤다. 인공의 빛이 화려하게 빛나는 거리는 한낮의 밝음과는 다른 은밀한 유혹으로 사람의 마음을 끌었다. 사람들은 불빛 사이를 헤엄치듯 미끄러지고 있었다. 밤 외출을 나온 A도 무리에 섞여서 같이 헤엄쳤다. 떠들썩하니 술집으로 몰려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부둥켜안듯이 끌어안고 걸어가는 젊은 남녀도 보였다.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걷다보니 연구소 동료들과 와 본 적이 있는 술집이 눈에 띄었다. 활짝 열린 문안으로 들어간 A는 잠시 망설였다. 여기저기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A처럼 혼자 온 사람은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자리에 앉자 낯선 사람들은 모두 A를 환영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의 친절에 얼떨떨했지만 그들의 유쾌한 기분에 휩쓸리는 것이 싫지 않았다. 유인원연구소? 아, 우리나라에 그런 것도 있나요, 재미있겠네. A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던 사람이 이렇게 말하자 다른 사람이, 재미는 있겠지만 돈은 못 벌겠는데, 하면서 A의 등을 탁 쳤다. 김대리도 거기로 가야되는 거 아냐, 연구대상으로 말야, 딱 원숭인데 말이지, 그들은 와르르 웃었다. 김대리라고 불린 사람은 아닌 게 아니라 약간 원숭이상이기는 했다.

새로 등장한 A때문에 왁자지껄 떠들던 그들은 어느새 자기들끼리 화제를 이어갔다. 이번에 얼마 벌었어. 으응, 수익 좀 잡았지. 개미들은 눈물깨나 흘렸을 걸. 자, 잔들 들어. 내가 쏜다. 기분이 몹시 좋아 보이는 이들은 증권회사에서 일한다고 했다. A는 그들의 대화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뭔가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한참 마시고 떠들다가 누군가, 노래방으로, 하자 모두들 왁자지껄 밖으로 나왔다. 곳곳에 화려한 술집들과 함께 노래방이 보였다. A도 처음 만난 증권회사 사람들과 함께 술에 취하고 흥에 취해 그날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정신이 없었다. 잘 부를 줄도 모르는 네버랜드 노래를 목청껏 불렀고 사람들은 그의 서툰 노래에 와그르르 웃으며 좋아했다. 누군가의 명함을 받았고 A도 명함을 줬던 게 어렴풋이 기억났다.


밤의 열기에 들뜬 거리를 혼자 걷고 있었다. 요란하게 화장한 거리의 불빛들이 어서 들어오라고 지나는 사람을 유혹했다. 낯익은 술집이 보였으나 어쩐지 마음이 안 내켜 그냥 지나쳤다. 뭔가 새로운 걸 만날 것 같은 예감에 무작정 걷다가 A는 문득 낯선 골목에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언제 사라졌는지 골목 안은 어두웠다. 다시 밝은 곳으로 나가려고 걸음을 재촉했지만 길은 자꾸 A를 낯선 곳으로 끌고 갔다. 골목은 골목으로 이어졌고 어디선가 하수구에서 나는 것 같은 퀴퀴한 냄새가 났다. 자기가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네버랜드에 어떻게 이런 곳이 있는지 모두 낯설었다.

냄새가 나는 골목을 지나자 새로운 골목이 나타났고 어둠 속에 뭔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A는 겁이 났지만 무서움보다 호기심이 더 강했다. 용기를 내 가까이 다가가니 끅끅 쥐어짜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조여 오는 것 같은 울음소리였다. 여보세요, 어디 아프세요, 조심스럽게 웅크리고 있는 사람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그 사람은 일어나 계속 끅끅거리며 가버렸다. 멍하니 뒷모습을 바라보던 A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아무리 걸어도 처음에 갔던 불빛 찬란한 거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술집도 노래방도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골목 어디선가 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박명 같은 희미한 어둠 속에 한 남자가 누워있고 그 옆에서 여자와 아이가 울고 있었다. 노동자 차림의 남자는 앙상하게 말랐고 여자와 아이의 모습도 비참했다. A가 다가가자 그들은 사라져 버렸다. 길은 계속 이어졌다. 저 앞에서 머리를 늘어뜨리고 울고 있는 교복 차림의 여학생이 보였다. A는 걸음을 빨리 하며 다가가려고 했지만 그 학생은 자꾸 멀어졌다. 그녀의 머리칼에서는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모퉁이를 돌아간 여학생은 A가 쫓아갔을 땐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길은 한없이 이어지는 것 같더니 A는 어느새 처음의 번성한 거리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집에 돌아온 A는 꿈도 없는 깊은 잠을 잤다.

지난밤에 본 것을 연구소 동료에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통곡하는 사람들 얘기를 헛소문이라며 껄껄 웃던 얼굴이 떠올라 A는 망설였다. 게다가 어젯밤에 본 것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종잡기도 어려웠다. 어두운 골목에서 혼자 울다 사라진 사람들, 잘못하면 날 미친 사람 취급하지 않을까. A는 결국 처음 통곡하는 사람들 얘기를 해줬던 동네 세탁소 주인을 찾아갔다.

- 혹시 악몽을 꾸신 거 아녜요?

- 아닌데,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A는 사실 자신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자기도 꿈을 꾼 게 아닌가 생각했던 것이다.

- 전에 통곡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잖아요.

- 에이, 그거 헛소문이에요. 그런 헛소문 퍼뜨리는 놈들은 다 잡아다가 감옥에 처넣어야 돼요.

세탁소 주인은 자신도 그 소문을 A에게 전달해 준 당사자라는 것을 잊었는지 그런 말을 했다.

- 쓸데없는 소릴 하면서 불평하는 놈들이 있어요. 그런 것들은 다 삐뚤어진 놈들이죠.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게 다 누구 덕인데, 복에 겨워서 그따위 소릴 하는 거예요. 하여간 틈을 보이면 안 된다니까. 그런 놈들은 끽소리 못하게 힘으로 콱 눌러버려야 돼요.

더 이상 얘기했다가는 자기도 끽소리 못하게 만들 것 같아서 A는 입을 다물었다. 마침 그때 세탁소 주인이 틀어놓은 방송에서는 헛소문과 불평분자들에 대한 패널들의 성토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 좋은 세상에서 쓸데없이 헛소문이나 퍼뜨리고 불평을 일삼는 자들이 있다면서 모두 바다 속에 처넣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아니, 어떻게 저런 말을ㅓ … A가 놀라자 세탁소 주인은 웃었다.

- 아, 농담이죠, 농담, 큭, 농담 모르세요? 보세요. 저 분들도 그런 일 없다고 하잖아요.

A도 세탁소 주인 말처럼 악몽을 꿨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유인원들의 변화가 심상치 않았다. 얼마 전부터 친위대 사이에 분열 조짐이 있었는데 이제 그것은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반항하는 유인원들을 때려잡던 친위대가 자기들끼리 싸워 부상하는 놈들이 속출했다. 힘이 좋은 놈들이라 싸움이 치열했고 그만큼 부상의 정도도 심각했다. 연구대상인데 놈들에게 심각한 이상이 생기면 곤란하겠지만 그렇다고 A가 개입할 수는 없었다.


거리는 붉은 색, 푸른 색, 온갖 색깔의 불빛으로 휘황했다. 문을 활짝 열어놓은 술집마다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삼삼오오 짝지어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도 모두 행복해 보였다. 지난 번 어둠 속에서 만난 사람들이 꿈이었을까, A는 그 길을 다시 찾고 싶었다. 기억을 더듬으며 그날 갔던 길을 되짚어 가다보니 언젠가 와 본 것 같은 낯익은 골목이 나타났다. 희미한 박명에 잠긴 골목을 더듬거리듯 따라가다가 목을 맨 채 축 늘어진 사람을 본 A는 기겁했다. 멈칫하다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 사람은 스르르 내려오더니 흐느적거리며 걸어갔다. 어둠 속에 사라져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A는 빠른 걸음으로 뒤쫓아가보았다. 그러나 흐느적거리는 걸음을 따라잡기 어려웠다. 꺾어진 골목으로 들어간 그 사람은 A가 뒤쫓아 갔을 땐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어둠 속의 존재를 만난 A는 그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목을 매던 사람이 사라진 골목을 무작정 따라가 보았다. 길은 한없이 이어졌다. 처음 술집 거리에서 얼마나 멀리 왔는지 알 수 없지만 다리가 뻐근했다.

그때 골목과 교차하는 십자로에서 새로운 사람들의 행렬이 나타났다. A의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이와 직업이 각양각색으로 보였다. 양복을 잘 차려 입은 사람, 노동자 복장을 한 사람, 허리가 심하게 굽은 허름한 차림의 노인,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시골 할머니,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 등등 여러 사람이 보였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말없이 걷고 있었다. 항상 즐겁고 근심걱정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인공 불빛이 휘황한 거리의 사람들과는 너무 달랐다. A도 부지런히 행렬의 뒤를 따라갔다. 아무리 발걸음을 재촉해도 가까워지지 않는 건 여전했다. 한식경쯤 걸었을까, 행렬의 앞에서 짙은 안개가 슬금슬금 몰려오더니 이들을 하나 둘 삼켜버렸다.


친위대 간의 싸움은 대단히 흥미롭게 진행되었다. 그동안 당하기만 하던 유인원들이 친위대의 분열을 틈타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수도 좀 늘어난 것 같았다. 흥미로운 것은 처음부터 복종하던 놈들이었다. 이놈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저 전과 다름없이 먹이를 갖다 바치고 열심히 먹이를 구할 뿐이었다.


은성한 불빛 아래 술과 즐거움이 넘쳐나는 거리에서 A는 다시 증권회사 직원들을 만났다. 술집 안은 여전히 떠들썩하고 즐거운 기분이 가득했다. 아, 오랜만이요. 잘 됐네, 같이 마십시다. 안 그래도 그들을 만났으면 했던 A는 얼른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여전히 낄낄대고 시시덕거리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동안 왜 통 안 나왔어요. 원숭이들이 속을 썩였나. 별 것도 아닌 말에 그들은 킬킬거렸다. 사실은… 이상한 걸 봤어요. A는 이들의 유쾌한 기분을 망칠까봐 걱정하면서도 용기를 냈다. 그가 어두운 골목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자 그들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 앞에 있는 테이블을 마구 두드리며 웃는 사람, 발을 구르는 사람, 물개 박수를 치는 사람, 웃는 모양도 가지각색이었다. A는 어리둥절했다. 그가 본 것은 전혀 우스운 일들이 아닌데, 이들이 미친 듯 웃어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주 독창적인 개그를 하는 분이야. 이 태평성대에 우리가 심심해 할까봐 그런 농담을 하시다니, 자, 건배합시다. 그 소리에 모두들 잔을 높이 들었다. A도 얼떨결에 잔을 들어올렸다. 그 귀신들한테도 한 잔 줄까. 누군가 한 마디 하자 그들은 일제히 잔을 바닥에 부어버렸다. 그들과 함께 부어라 마셔라 하다가 누군가 또 노래방, 하고 소리치자 우르르 그리로 몰려간 것까지 A는 기억했다.

다음 날, 해가 높이 떴을 때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어제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겨우 일어나 씻고 나서 A는 연구소에 가는 대신 어젯밤에 갔던 술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왜 진작 낮에 가볼 생각을 못했을까.


술집 거리에 왔을 때 A는 잘못 찾아왔나 눈을 의심했다. 여전히 거리에 사람들은 많았지만 밤과는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그래도 어렵지 않게 전날 증권회사 직원들과 술을 마시던 집을 찾았다. 술집 문은 닫혀 있었다. 이른 오후에 문을 연 술집은 거의 없었다. 기억을 더듬으며 며칠 밤 쫓아다녔던 골목길을 찾아보았다. 술집 거리에도 골목은 많았다. 처음 들어갔던 어두운 골목을 찾아 기억을 더듬으며 걸었지만 어느새 길은 달라져 있었다. 웅크려 앉아 혼자 울던 사람, 머리칼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눈물을 흘리며 걸어가던 여학생이 있던 골목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리가 뻐근하도록 걸었지만 희미한 박명에 젖어있던 그 골목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비슷한 길인 듯싶어 따라가 보면 전혀 다른 길이었다.

그런데 대낮의 거리가 어딘가 모르게 전과 달라보였다. 처음 네버랜드에 도착해서 걸었던 길들, 부서지는 햇살 아래 빛나던 거리, 번영과 풍요를 온몸으로 과시하듯 드러내던 거리, 이 빛나는 겉모습 뒤로 살짝 돌아가 보니 퀴퀴한 냄새 나는 침침한 골목이 나타났다. 밤에 보았던 골목들과는 달랐지만 어딘가 남루하고 너덜너덜해 보이는 것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네버랜드의 빛나는 거리와도 달랐다. 어둠 속에서 목을 매단 사람이나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걸어가던 젊은이, 늙은이, 아이들의 행렬은 보이지 않았지만, 소매 끝이 헤진 낡은 옷에 어깨가 쳐진 중년 남자가 보였다. 실의에 빠진 사람처럼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남자는 자칫 밤에 본 사람처럼 목을 매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골목을 빠져나오니 교복 입은 학생들이 몰려나왔다. 학교가 가까이 있는 걸 A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자기 몸무게보다 무거운 가방 때문에 양 어깨가 주저앉은 학생들은 학교 앞에 세워져 있는 여러 대의 미니버스로 몰려가고 있었다. 너 시험 잘 봤니? 아니, 망했어. 어제 학원에서 찍어준 문제가 하나도 안 나왔잖아. 그 선생 순 엉터리 아냐. 왁자지껄 떠드는 학생들 중에서 어떤 학생은 훌쩍거리며 울고 있었다. 야, 새꺄, 왜 그래. 이번에 아무래도 일등 못할 거 같애. 이런 재수 없는 자식. 성적 떨어지면 우리 엄마한테 맞아 죽는단 말야. A는 그들의 대화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네버랜드 학생들의 우수함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세계대회에서 놀라운 성적을 거두는 학생들을 키워내는 그들의 교육제도는 다른 나라에서 부러워 할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학교 앞에서 학원 버스를 타러 가는 학생들은 하나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다시 큰 거리로 나왔다. 여전히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고 거리는 활기가 넘쳐보였다. 고층건물의 유리벽이 되쏘는 강렬한 햇빛은 여전히 눈부셨다. 뽀얗게 화장한 젊은 여성들의 짧은 치마는 위태로워 보였고 굽 높은 구두를 신은 그들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발이 부르틀 정도로 종일 시내를 걸어다닌 A는 다시 동네 세탁소를 찾았다. 마침 이웃에 있는 식당 주인도 와 있었다. 그들은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 살기 어렵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 식당에도 손님이 줄었어. 근근이 현상 유지는 하고 있지만 걱정이네.
- 세탁소도 마찬가지야. 그게 다 트집 잡고 불평하는 놈들 때문에 경기가 돌지 않아 그런 거 아냐. 그런 놈들 때문에 높으신 분께서 나라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있나, 원.

- 전에 태평성대라고 하지 않았어요?

- 태평성대는 태평성대죠, 나라 일 방해하는 놈들만 없으면…

- 누가 그렇게 나라 일을 방해하나요?

- 그런 놈들이 있어요, 불순분자들. 사사건건 트집 잡고 불평하는 놈들. 높으신 분께서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실 텐데, 괜히 트집 잡는 놈들이죠.

- 옛날이 좋았어. 말 안 듣는 놈들은 잡아다 족쳐야 되는데 좀 풀어주니까 이놈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불고 있잖아.

식당 주인도 한 마디 거들었다. 두 사람도 특별히 힘 있는 사람들 같지는 않은데 왜 이렇게 흥분해서 높으신 분을 염려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세탁소 주인이 틀어놓은 방송에서는 연휴를 맞아 수만 명이 해외여행을 떠나고 있다면서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네버랜드 국민들의 여유로운 생활을 소개하고 있었다.


낯설고 어두운 길이 계속 A를 이끌었다. 골목에서 골목으로 이어지던 길의 끝에서 갑자기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갑자기 나타난 광장에 어리둥절할 새도 없이 A는 광장에 앉아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리를 보았다. 광장은 조용했다. 처음 세탁소 주인한테 들은 것처럼 통곡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A는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싶었다. 그러나 광장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수의 병사들이 시커먼 갑옷과 투구로 중무장한 채 방패와 창을 들고 침묵하는 사람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A는 잠깐 혼란스러웠다. 지금이 이십일 세기 아닌가, 내가 중세로 잘못 찾아온 것인가. 앉아 있는 사람들도, 방패를 든 병사들도 모두 말이 없었다. 한 발짝 다가가자 갑옷 입은 병사 하나가 ‘찔러’ 자세로 창을 앞으로 내밀며 위협했다. A는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그때 어두운 하늘에서 구름에 가렸던 달이 어둠을 물리치고 나타났다. 달빛은 병사들의 창에 부딪치면서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비췄다. 그들의 얼굴에서 무언가 반짝 빛났다. 눈물이었다. 꼿꼿이 얼굴을 들고 앉아 있는 사람들 눈에서 소리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병사들의 창에 반사된 달빛에 그들의 눈물은 얼굴마다에서 별처럼 빛났다. A는 슬프면서도 장엄한 광경에 압도되었다. 가슴 속에서 뭔가 뭉클한 것이 치밀어 올라 목울대를 울렸다.


유인원들에게 대단한 변화가 일어났다. 친위대끼리 싸우고 분열하는 사이에 저항하던 무리의 수가 불어나더니 결국 우두머리를 쫓아내버린 것이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A는 하루하루 그들의 행동이 너무 놀라워 모노폴리스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계속 자연동물원에 머물며 관찰했다. 우두머리를 쫓아낸 다음 유인원들의 행동은 더 이상했다. 저항하던 무리들은 기뻐하며 새로운 우두머리를 뽑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처음부터 복종하던 무리들은 불안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복종하는 무리들이 친위대의 폭력을 덜 당하기는 했지만 가끔 그들에게도 불똥이 튀었고, 서슬퍼런 우두머리의 폭력이 전체 유인원들의 머리 위에 암울한 기운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런 폭력적인 우두머리가 사라졌는데 좋아하기보다 불안해하는 무리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A는 혼란스러웠다.

연구소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여전히 잘 돌아가는 듯 보였다. 연구소 안에만 있으면 세상 근심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연구원들은 적당히 맡은 일을 처리하면서 한가롭게 자기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연구소인 만큼 연구원들의 대우도 좋아 신의 직장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이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면 A도 밤 외출에서 자기가 본 것들이 헛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렇게 아무 일 없이 잘 돌아가고 있는 세상과 어둠 속에서 비탄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A가 유인원 연구에 열정이라도 보일라치면 다른 연구원들이, 적당히 해요,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아, 하고 말하곤 했다. 이 사람들에게 내가 본 것을 얘기하면 뭐라고 말할까. 밤에 만난 사람들하고는 너무도 다른 편안한 얼굴들을 보면서 A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뭘 그렇게 열심히 생각하세요. 그런 A를 보고 뜻밖에 K가 말을 걸어왔다. 평소에 다른 연구원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말도 별로 없어서 A도 어렵게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뜻밖이었다. 그래, 이 사람에게 물어보자. A는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처음 밤 외출에서 만난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광장에서 본 광경까지 얘기를 하는 동안 K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자기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을 처음 만난 A는 기뻤다. 한 번도 말을 끊지 않고 듣기만 하던 K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 당신이 본 것은 노예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 노예요?

- 네버랜드 사람들은 말 잘 듣는 착한 국민들이죠.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노예인 줄도 모르고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높은 사람이 힘으로 눌러야 좋아하죠. 깡패 보스처럼 강력한 힘으로 국민을 눌러야 강한 지도자라고 좋아한답니다. 뿐만 아니라 노예가 되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몹시 미워해요. 지도자가 국민들의 생각을 존중해주면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뭐 저런 나약한 놈이 지도자를 하느냐고 때려잡습니다. 모름지기 지도자는 철권을 휘둘러야 한다고 믿고 있거든요. 자유를 누릴 줄 아는 능력이 없다보니 노예의 행복이 더 좋다는 거죠.

네버랜드 사람들이 노예로 살고 있다는 말에 A는 충격에 빠졌다. 이들의 행복이 노예의 행복이었다고? 이들은 노예로 사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K의 말을 들으면서 세탁소 주인과 식당 주인이 떠올랐다. 그들이 왜 불평하는 사람들을 불순분자라고 분개하는지 알 것 같았다.

- 그럼 당신은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인가요?

K는 피식 웃었다.

- 이 좋은 직장에 붙어 있으려면 노예가 되기를 거부해선 안 되죠. 거부하는 순간 저는 당신이 밤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유령이 되어 떠돌 텐데, 미안하지만 저한텐 그런 용기가 없습니다.

- 잘 모르겠군요. 유령이 되더라도 노예로 사는 것보단 나은 게 아닌가요?

K는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날씨가 환장하도록 좋은 주말, 이런 날씨에 집안에 죽치고 있는 것은 죄악이라고 믿는 네버랜드 사람들답게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도심지는 사람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A도 물결을 따라 걸었다. 그런데 뭔가 전과는 달랐다. 이리저리 출렁이며 흘러가는 물결이 아니라 새로운 물결은 열을 지어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물결은 점점 더 불어났다. 금방이라도 성난 파도가 될 것 같았다. A도 어느새 그 물결 속에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물결은 조용히 흘러갈 뿐, 파도치지 않았다.

A는 문득 밤의 외출에서 보았던 광장과 비슷한 곳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혼자가 아니었다. 거대한 사람들의 물결과 함께였다. 역시 광장 한 가운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밤에 보았던 병사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병사들의 방패는 어둠 속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견고했다. 높이 솟은 견고한 방패는 도저히 뚫고 들어갈 엄두도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밝은 대낮에도 이들을 볼 수 있다니, A는 놀랍고 감격스러웠다. 그들은 어둠 속에만 존재하는 유령들이 아니었다.

행진하던 사람들의 물결이 광장으로 다가가자 어디선가 엄청난 물폭탄이 행렬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쏟아져 내리는 물의 힘은 행진하던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쓰러뜨리기에 충분했다. 방패 울타리 안에 갇힌 사람이나 밖에서 행진하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물대포는 마구 쏟아져 내렸다. 여기저기서 병사들이 커다란 물총을 모인 사람들 얼굴에 대고 쏘기도 했다. 그래도 병사들이 대포에 탄환 대신 물을 장전한 것은 참 자비로운 처사였다. 그러나 A는 곧 깨달았다. 그 물은 대포의 탄환 못지않은 위력을 지닌 것이라는 사실을. 물에 맞은 피부가 마구 성을 냈던 것이다. 따갑고 쓰리고 견디기 어려웠다. 눈도 뜰 수 없었다. 세상에 이런 물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 무시무시한 물세례를 피해 사람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대열은 엉망이 되었다. 넘어지고 밟히고 몽둥이에 맞아 피를 흘리고, 그 와중에 어떤 병사들은 시민들의 팔다리를 잡아 질질 끌고 갔다. A는 아비규환이라는 말을 현실에서 봤다. 사람들에 떠밀려 어느 골목에 들어온 A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골목에는 A말고도 몇 사람이 같이 쫓겨 들어와 있었다. 그 사람들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밤에 봤던 사람들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낮의 사람들은 물대포를 맞고 강제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A는 자기가 왜 이런 일을 당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폭력을 당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 저 병사들은 왜 우리한테 이렇게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두르는 겁니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손수건으로 눈을 계속 눌러대고 있는 옆 사람에게 물었다.

- 우리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죠.

그 사람은 눈을 심하게 깜박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래도 눈물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 두려워하다니, 당신들은 아무런 무기도 없고 그냥 모여서 거리를 행진한 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병사들은 막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당신들이 왜 두렵습니까?

- 저 사람들은 우리가 모여 있는 것을, 아니 우리의 존재 자체를 두려워합니다.

- 당신들이 어떤 사람들인데요? 왜 모여서 행진을 합니까?

- 우리들은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K와 같은 말을 했다. 하지만 다른 연구원들이나 밤에 만났던 증권회사 직원들, 동네 세탁소나 식당 주인들까지도 A가 본 것을 농담이라고, 헛소문이라고 웃어버렸다. 그 사람들은 세상은 아무 일 없이 잘 돌아가고 있으며 오늘 만난 이런 사람들을 불평만 일삼는 불순분자라고 했다.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 저도 일을 당하기 전에는 제가 노예인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나만 열심히 잘 살면 되는 줄 알았죠. 그런데, 제가 일을 당해보니까 알겠더군요. 우린 그저 저들의 권력을 뒷받침해주는 노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당신은 대체 무슨 일을 당했길래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됐나요?

그가 뭐라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한 떼의 사람들이 또 골목으로 쫓겨 들어왔다. 새로 밀려들어온 사람들 때문에 A와 얘기하던 사람은 저만치 멀어졌다. 골목으로 쫓겨 들어온 사람들은 다시 거리의 대열에 합류하려고 나갔다. A도 따라 나갔다. 그러나 물대포의 힘이 워낙 강해서 이를 뚫고 앞으로 나가기가 너무 어려웠다. 밤이 한참 깊어질 때까지 몇 시간을 쫓기고 밀리다가 A는 어떻게 숙소로 돌아왔는지 몰랐다.

다음날, 이 신문 저 신문 찾아보고 방송을 이리저리 돌려봐도 어젯밤 일은 아무 데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병사들이 그렇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둘렀는데도 뉴스 어디에서도 그 일을 찾아볼 수 없었다. A는 사람들이 왜 헛소문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새로운 주가 시작됐을 때 A는 연구원들에게 자기가 겪은 일에 대해 말을 꺼내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손을 홰홰 내저으며 자리를 피하거나, 그런 뉴스를 본 적이 없는데 웬 엉뚱한 소릴 하세요, 하면서 그를 위험한 전염병 환자 보듯이 쳐다봤다. A는 처음 노예 얘기를 꺼냈던 K를 찾았다.

- 네버랜드의 모든 국민들이 자신이 노예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광장으로 나가지 않는 한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가 무슨 일을 당하건 별 관심이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노예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까지 미워하니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 그렇게 잘 아는 당신은 왜 광장에 나가지 않습니까?

- 제가 말씀드렸죠. 저는 비겁한 사람이라고.

전에도 그랬지만 그의 말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비겁한 게 자랑은 아닌 것 같은데, 자기는 비겁한 사람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버리는 그가 얄밉기까지 했다.

유인원들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반항하던 무리들이 선택한 새로운 우두머리가 쫓겨나고 폭력적인 우두머리가 다시 돌아와 있는 게 아닌가. 그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보이던 유인원들이 돌아온 우두머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은 친위대와 합세하여 반항하는 자들에게 전보다 더한 핍박을 가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자유는 대단히 불편했던 모양이다.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우두머리가 그리웠던 것이다.

A는 네버랜드의 유인원 생태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다음과 같이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네버랜드의 유인원들은 강력하고 폭력적인 지도자에게 복종하기를 좋아한다. 자유가 주어지면 그들은 불안해하고, 우두머리가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주면 이를 나약함의 소치라 여겨 그런 지도자를 배척한다. 일부 유인원들은 이와 달리 폭력에 반항하는 행동을 보이지만 수가 적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반항하는 유인원들은 학습과 경험에 의해서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A는 주말마다 광장으로 나갔다. 밤의 광장이 아닌 낮의 광장으로. 광장에 모이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뉴스 어디에서도 그들의 존재는 찾아볼 수 없었고 연구소 사람들이나 밤의 술집에서 만난 증권회사 직원들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2015.5)



** 고(故) 최인훈선생에 대한 오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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