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희생자들을 위하여

by 이인숙 insouk lee

"내 아들이 죽었는데도 기차가 달리고 계절이 바뀌고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까지는 참아줬지만 88 올림픽이 여전히 열리리라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내 자식이 죽었는데도 고을마다 성화가 도착했다고 잔치를 벌이고 춤들을 추는 걸 어찌 견디랴. 아아, 내가 만일 독재자라면 88년 내내 아무도 웃지 못하게 하련만, 미친년 같은 생각을 열정적으로 해본다.”(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1988년 여름에 20대의 아들을 잃은 선생은 참척의 슬픔을 토로하면서 하늘을 원망했다. 어떻게 아직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지, 통곡하다 지치면 설마 이런 일이 나에게 정말 일어났을라구, 꿈이겠지 하는 희망으로 깜박깜박 잠이 들곤 했다고 한다. 자식 잃은 고통과 슬픔을 가리키는 ‘참척’이라는 말은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혹한 슬픔이라는 뜻이다.


2014년 4월 16일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304명의 희생자를 낸 세월호 참사에서 10대의 어린 학생들은 어른들이 우릴 구해주겠지 하는 믿음으로 가만있으라는 어른들의 말을 듣고 배안에서 기다렸다. 하루 종일 배가 침몰하는 광경을 보면서 우리는 왜 그들을 구하지 않았는지, 충분히 살릴 수 있었는데 왜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 분노하고 비통해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아직도 아이들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진상이 다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2년 10월 29일 그때 희생당한 어린 학생들과 비슷한 세대의 20-30대 젊은이들이 서울 한 복판에서 길을 가다가 인파에 눌려 세상을 떠났다. 8년 후에 다시 겪는 참사다. 왜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것일까. 이것이 대한민국의 한계인가. 올해 처음 있는 축제가 아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젊은이들의 축제에 인파가 몰리는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공권력은 아무 대비도 하지 않았을까. 이전에 사고가 없었던 것은 공권력이 동원되어 질서를 유지하고 위험을 막았기 때문이다. 이태원에 십 년째 살고 있는 지인은 해마다 이때는 차량통제를 해서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는 공간을 넓혀줬는데 올해는 차량통제도 없었다고 한다. 왜 이렇게 안이했을까. 158명의 희생자가 나온 참사에도 고위 공직자들은 책임회피에 급급하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를 선택한 것은 국민이다.


희생자들 가운데 십대와 이십대, 삼십대가 148명으로 94퍼센트가 넘는다. 그야말로 꽃다운 나이에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한 꽃송이들이 참혹하게 떨어져 버린 것이다.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꾸었던 꿈들은 지금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누구 탓만 하는 현실을 보면서 이 영혼들은 편안히 잠들 수 있을까.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가 있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멀어지고 잊혀져가는 젊음을 노래한 가객도 서른을 조금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 10.29 참사에 세상을 떠난 젊은이들의 서른 즈음은 어디에 있을까. 서른을 앞둔, 혹은 갓 넘긴 청춘들의 서른도 있지만, 이미 서른을 보낸 40-50대의 중장년에게도 서른 즈음의 추억은 있다. 그러나 이제 이들에게 더 이상 ‘서른 즈음’은 없다.

지금 우리는 희생자들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분향소에 가도 사진도 위패도 없다. 젊은 나이에 국가의 직무유기로 세상을 떠난 억울한 희생자들을 익명 뒤에 감춰버린 것이다. 희생자들은 158이라는 추상적인 숫자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살아온 역사가 있고 가족과 친구들과 애틋한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름도 불러줄 수 없는 사람을 진정으로 애도할 수 있는가.


세상이 멈추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참척의 고통은 또 어찌 헤아리랴. 내 자식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어제처럼 여전히 해는 뜨고 사람들은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고 학교에 간다. 자식을 잃은 어떤 이는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으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답답해서 숨을 쉴 수 없었다고 한다. 눈물 닦는 것도 힘들어서 화장실에 들어가 수돗물을 틀어놓고 통곡을 했다고…. 자식 잃은 슬픔을 혼자 견디기 어려워 부모들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찾는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 나도 그렇게 버텨낼 수 있을지 알고 싶다. 참혹한 슬픔도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함께 나누다 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고 위안이 된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유가족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유가족들의 연대의 힘이 컸을 것이다. 권력은 최소한 10.29 참사 유가족들이 만나 서로 버팀목이 되어줄 기회조차 막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고양신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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