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숫자에 불과할까
분명 그런 면도 있다. 도전하기 좋은 나이, 안주하기 좋은 나이, 결혼하기 좋은 나이란 수치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사람의 생에서 10년의 세월은 사고가 달라지기에 충분한 시간이라는 점에서, 단순 숫자에 불과한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나는 매 순간 조금씩 변해가고 있겠지만, 2020년은 스스로 인지하기에도 지각이 흔들릴 만큼 기존에 추구하던 것이 변해가는 것 같기에, 혼란스럽다. 비슷한 세월을 산 친구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 나이에는 다 그런 건가’하고 결론을 쉽게 내버리고 마는데, 그게 어쩌면 복잡한 우리의 심정을 가장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말이라서가 아닐까. 뭉근하게 생기는 고민이나 질문이나 답답함이라는 게 논리적으로 이해되고 설명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오려면, 이미 그 기간에서 멀찍이 떨어져 나왔을 때니까. 그 시기를 걷고 있는 우리는 그저, ‘나이 들어서 그런가 봐’라고 말할 수밖에.
요즘 내가 나이 듦의 시그널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익숙함’이다. 익숙함에 익숙해진다. 가벼운 예를 들자면, 노래다. 새로운 신곡을 찾아들으며 내게 맞는 곡을 찾아가며 리스트업을 하기보다는 기존에 좋았던 노래의 추억에 젖어든다. 새로운 자극보다는 익숙함에서 오는 편안함과 즉각적인 몸의 반응이 반갑다. 꼭 노래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무엇을 추구하고 실행하고 있지만, 익숙한 사람들, 익숙한 노래들, 익숙한 공부, 익숙한 대화, 익숙한 운동에 관대해졌다고 할까. 익숙함은 내게 발목을 잡을 수 있는 무서운 것이고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어쩌면 에너지를 적절히 배분하여 사용하도록 하는 좋은 기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최근에 본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기쁨이와 슬픔이가 어우러진 기억이 형성되듯, 내게도 조금 복잡한 형태의 사고가 생겨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익숙함과 새로움의 적절한 조화.
정착 욕구와 순응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문을 두드려보고 싶었고 좋아했다. 요즘엔 새로운 탐색도 좋지만 정착 욕구가 든다. 수렵채집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정착해서 농사를 짓는 모습이 자주 떠오르고, 단기적인 미래보다 조금 더 장기적인 미래를 그려보고 싶다. 자라나고 있는 거겠지. ‘절대 그 길은 가지 말아야지’라고 했던 생각에도, ‘과연 그게 맞을까’ 반문해보게 되고, 내가 반(anti-)하려고 한 것이 목적 있게 반한 것인지, 그저 반항심에 기존의 질서라면 무턱대고 반한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이제 더 이상 반할 게 없어서 꼬리를 내려 버린 걸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분석해서 에너지를 집중하고 싶고 그 하나의 전략이 ‘순응할 것에는 순응하고 인정할 것엔 인정하자.’다.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
이 글을 쓰면서 조금 정리가 되었으려나. 혼란스러운 요즘. 바쁘니까 글을 쓸 여유도 없다.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에서는 구두를 신으면 내가 움직이고 싶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리듬에 그저 반응할 뿐이다. 해야 할 일이 던져지고, 해야 할 일을 먼저 처리하다 보니 구두를 신고 리듬에 혼을 빼앗긴 채 움직이는 것처럼 춤만 추고 있었다. 생각하기보다는 몸이 앞서 움직이곤 한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겠지만,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하고 구두의 리듬에서 구두를 벗고 맨발로 걸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