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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프그래퍼 May 28. 2019

PD의 꿈, 접게 된 이유

다 코멘터리: 미디어, 사람, 인생에 관한 온갖 잡다한 코멘터리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무려 8년동안 내 꿈은 다큐멘터리 PD였다.

어린 시절 맞벌이 가정에서 자랐던 나는 집에서 동생과 단 둘이 보내는 시간에 컴퓨터와 TV에 푹 빠져있곤 했다.


다큐멘터리 PD를 꿈으로 정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기본적으로 나는 사람을 좋아하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다. 학교 가는 길 버스에서, 야간자율학습시간에 복도에서 창밖의 사람들을 구경하며 그들은 어떤 스토리를 가지고 있을지 상상하는 아이였다. 그러던 중 학교에서 재일교포 학생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왠지모를 가슴의 울림을 느꼈다. 그 이후 전 세계의 다양한 사람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공유하는 직업을 갖고 싶어졌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PD를 꿈꾸기 시작했다.


Photo by George Coletrain on Unsplash






1. 너무 잘 맞았던 미디어 전공,

그만큼 잘 보인 트렌드 변화


고등학교 시절 교지편집부 동아리 활동과 학생회 활동에 재미를 느끼며 몰두했다. 그래서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고3 1년밖에 없었다. 남들 보다 늦게 시작한 공부였기에 발등에 불이 떨어져 더 열심히 했다. 수업 사이의 쉬는 시간에는 당연히 공부했고, 점심, 저녁, 청소시간에도 일찍 식사와 청소를 마치고 공부했다. 이렇게 자투리 시간까지 모두 아껴가며 공부에 매진한 결과 원하던 학과에 정시로 입학할 수 있었다.


2009년 언론정보학부로 입학한 후 첫 학기, 첫 전공 수업에서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공룡은 왜 멸종했을까?


전공 수업 교수님이 던지시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이어서 정말 뜻밖이었다. 교수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과제로 남기고 수업을 마치셨다. 그리고 그 다음 수업에서 답을 알려주셨다.



Photo by Adam Muise on Unsplash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유전적 다양성 부족으로인해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공룡이 멸종했다는 게 교수님의 답이었다. 전공수업 첫 학기 첫 수업에 교수님이 던진 이 질문이 의미하는 것은 뭘까. 당시 고등학생 티를 채 벗지 못했던 스무살의 나는 정확한 의미는 알지 못한채 그 질문을 머리 한 구석에 품고 다녔다.


그 후 학년이 바뀌고, 시대의 흐름을 몸소 체험하면서 그 질문의 의미를 점차 자연스럽게 깨달아갔다.

2009년 11월 우리나라에 아이폰이 출시됐다. 그 후 2학년 1학기에 들었던 전공인 뉴미디어 수업에는 몇몇 학생들이 아이폰을 가지고 있었다. 그 뉴미디어 라는 이름의 수업은 뉴 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IPTV를 뉴미디어의 마지막 챕터로 다루고 있었다. 그후 각종 스마트폰이 우리나라에 보급되면서 사람들의 미디어 사용 패턴은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급격한 변화였다.



Photo by You X Ventures on Unsplash



시대는 변화하는데 학교 수업은 그 빠른 변화를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게 눈에 보였다. 교수님들도 학생들에게 트렌드를 알려주기 위해 나름 열심이셨다. 어느날 전공 교수님 중 한 분은 본인의 연구를 위해 20대 초반의 젊은 학생들의 미디어 사용 패턴을 조사하기 위한 설문을 하시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학교 재학 중에 전공 명칭이 바뀌면서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언론정보학부가 사라지고 미디어학부로



Photo by Daniel Korpai on Unsplash



전공 명칭이 미디어학부(미디어 커뮤니케이션)로 바뀌면서 커리큘럼도 일부 바뀌었다. 과 이름도 바뀌고 블로그 등의 SNS와 관련된 수업이 추가로 개설되는 등 눈에 보이는 변화가 일어나자 학생들은 혼란에 빠졌다. 처음에 학생들은 과 이름이 바뀐 것을 못마땅해 했다. 나와 같은 연도에 입학한 동기들의 꿈은 대부분 비슷했다. PD, 기자, 아나운서. 이 친구들은 자신이 10대 때부터 열망했던 언론정보라는 명칭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미디어에 대한 뉴스에 흥미를 느끼는 학생이었고, 결과적으로 학교에서 전공명을 [미디어]로 바꾼 것이 매우 잘 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시대의 흐름에 맞는 당연하고 중요한 선택이었다. 친구들이 싫어하고 있을 때 나는 오히려 교수님들의 빠른 결정에 자부심을 느꼈다.







2. 정치외교학 복수전공 중 접한

인권 Human Rights


미디어와 정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분야다. 전공 수업 중에도 정치 커뮤니케이션 등 정치와 관련된 수업이 있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 정치 수업을 참 좋아했다. 정치 사상, 민주주의의 역사 등을 공부할 때 재미있었다. 그런데 대학생이 되고 나서 충격을 경험했다. 나름대로 나는 민주주의의 의미 등 정치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당시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이 뭐가 다른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현실정치에는 무지했던 것이다.


그래서 복수전공으로 정치외교학을 선택했다. 우리학교는 반드시 부전공이나 복수전공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었다. 어차피 새로운 분야를 공부해야 하는데, 기왕이면 내가 배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분야로 선택하고 싶었다. 정치외교학 수업들 모두 재미있었지만 그 중에서 '인권과 정의'라는 수업을 들으며 '인권'에 대한 인식이 생겼다.



Photo by Ben Sweet on Unsplash


인권의 시각으로 기존 방송 업계를 보니 총체적 난국이었다. 무리한 일정, 살인적인 근무시간, 쥐꼬리보다 적은 인건비 등... 인권을 조금 공부하니 방송 스태프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이 더 심각한 문제로 느껴졌다.


물론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내가 고3이던 시절에 방영했던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에는 방송PD가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그 드라마에서는 야외 현장에서 밤샘 작업하고, 늘 늦은 시간에 편집실에서 야근하는 PD들의 모습이 아름답게 미화되어 그려졌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그때까지 잘못된 것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열정을 다해 일하는 모습이 멋지게 느껴졌다.


그러나 정치외교를 공부한 이후 그 모습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다. 대학시절 나는 신문을 구독하면서 헤드라인이라도 매일 챙겨읽었는데, 방송과 영화 업계의 과로사나 사고 등의 기사가 보일 때면 마음이 정말 불편했다. 장자연 사건, 강용석 변호사의 아나운서 비하 발언도 나의 대학 재학 시절에 벌어졌다. 인권과 정의의 시선으로 보면... 경악을 금치 못할 일들의 연속이었다.


Photo by Aarón Blanco Tejedor on Unsplash


만약에 내가 정치외교학을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생각을 할 기회가 많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더 중요한 가치인지 알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 방송 업계의 부조리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미처 인식하지 못한채 꿈이라는 이름으로 그 불편함을 덮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부정적인 모습 말고도 미디어에 비춰지는 그 직업의 멋지고 빛나는 모습이 많았으니까.






3. 언론고시, 가난한 학생에게

크게 느껴진 기회비용


우리 부모님은 내가 가난을 모르게 키우셨다. 고등학생 때까지 집안 사정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해주시지 않았다. 대학 입학 후에도 직접 말씀해주시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만 학자금 대출을 내 손으로 신청하면서, 알바로 내 생활비를 충당해가면서 우리 집의 가난을 알아갔다.


아무리 그래도 부모님이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하실 정도로 집안 사정이 안 좋은 지는 몰랐다. 대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나는 워킹홀리데이를 가려고 준비해둔 상태였다. 학교다니면서 늘 알바를 병행했고 회사에서 인턴 생활도 했었다. 이렇게 틈틈이 돈을 모아서 왕복 비행기표와 한달치 생활비를 겨우 마련할 수 있었다. 나머지 생활비는 해외에서 일을 하며 벌 생각이었다. 어렸고 세상 물정 몰랐기에 할 수 있었던 용감한 결정이었다. 그 돈으로 학자금대출을 미리 조금 갚을 수도 있았지만, 학생 신분이기 때문에 졸업하기 전까지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볼 수 있는 유예 기간이라고 여겼다. 학자금 대출의 존재 이유가 경제 사정이 어려운 학생들이 학비를 버느라 다른 것들을 포기하지 않게 돕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Photo by 贝莉儿 NG on Unsplash


그런데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하던 어느날, 어머니가 나에게 200만원만 빌려달라는 말씀을 하셨다. 놀랐다. 학생인 나에게 200만원이면 큰 돈이지만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그게 그렇게 큰 돈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200만원이 없어서 아직 학생인 자식에게 빌려달라는 말을 꺼내기까지, 그 심정이 어땠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다. 하지만 워킹홀리데이를 위해서 내가 어려운 와중에도 얼마나 그 돈을 열심히 모았는지를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그리고 이기적인 결정을 했다. 내가 아직 학생인데 벌써부터 집안 일 때문에 내가 원하는 걸 포기한다면, 이걸 시작으로 앞으로 더 큰 희생을 해야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부모님은 나를 위해 정말 많은 희생을 하셨는데, 이기적이게 내 행복을 위해서 돈을 안 빌려드린 내 자신의 모습에 참 속상했다.


그렇게 워킹홀리데이를 가서 열심히 살았다. 말 그대로 눈물젖은 빵을 먹으면서 힘겹게 알바를 구하고, 하루에 10시간씩 서서 일하며 지냈다. 그 사이 살도 몰라보게 쪽 빠졌다. 그래도 참 행복했지만 한켠에 부모님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늘 있었다. 한국에 다시 오기 전에 워킹홀리데이를 통해 번 돈으로 해외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봤다. 특히 터키에서 나와 동갑인 청년이 시장에서 일하고, 아직 학교도 안 다닐 것 같은 어린 아이가 거리에서 해맑게 웃으며 모자를 파는 모습을 보며 부모님에 대한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이 더 커졌다.




Photo by Kevin Delvecchio on Unsplash



맞벌이 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면서, 늘 집에는 나와 동생 단 둘만 있었다. 부모님은 늘 아침 일찍 나가서 밤 늦게 들어오셨기 때문에 끼니를 항상 동생과 둘이 해결했다. 대학 시절에는 학비를 대부분 학자금 대출로 충당하고 내 생활비는 스스로 벌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나는 혼자 컸다고 오만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밖에서 더 큰 세상을 눈으로 보고 나니, 내가 매일 따뜻한 밥을 먹고 따뜻한 집에서 잘 수 있게 해주신 부모님이 내게 얼마나 큰 것을 그동안 주신 건지 절실히 느꼈다. 힘들어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해 도전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원래 내 계획은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한국에 오면 4학년 2학기로 복학하고 학교 언론고시 준비반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오래 꿈꿔온 PD의 꿈에 본격적으로 도전하기 위해서다. PD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대학시절 나는 어려운 와중에도 다양한 경험을 쌓고 내 그릇을 넓히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러나 막상 한국에 오니 현실이 느꼈다. 내가 자리를 비웠던 시간동안 친구들은 취업을 위해, 언론고시를 위해 각자 고군분투하며 힘들어하고 있었다. 같은 과 안에서도 정말 공부를 잘하던 한 친구는 휴학도 없이 언론고시 공부를 하다가 꼬박 2년만에 원하던 직업을 갖게 됐다. 기존의 꿈을 포기하고 취업 준비를 하던 친구들도 1년동안 취업 준비를 하며 정신적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고 있었다.



Photo by REKORD furniture on Unsplash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기 직전 우리 집의 심각한 경제 상황을 알게 됐던 나는

한국에 와서 친구들의 사례를 통해 언론고시가 얼마나 오랜 준비 기간을 필요로하는지 얼마나 기약 없는 투자를 해야하는지 옆에서 눈으로 보게 됐다.

진지하게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해외에서 혼자 힘으로 살면서 의식주에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드는지 체감했었다. 용돈을 받으면서 언론고시 준비를 할 수는 없었다. 이전처럼 알바를 하면서 공부를 한다면 공부에 매진해도 합격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알바에 시간을 크게 빼앗기는 것이다. 합격과 멀어지는 게 당연했다.







4. 고등학생 때의 꿈,

어린 학생의 좁은 시야로 결정했던 것


다큐멘터리 PD.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가졌던 꿈이었다. 자그마치 8년을 가슴에 품고 있던 꿈이었다. 원하던 과에 입학한 후 학교생활을 하면서 한번도 다른 꿈을 꾼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늘 학교와 사회에서 꿈을 크게 가지라고 했었다. 다른 친구들이 어떤 걸 하고 싶은지 몰라 고민할 때도 나는 하고싶은 게 확실하다는 것이 좋았다. 당연히 4학년이 되면 학교 언론고시 반에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4학년 2학기 복학을 앞두고, 학교 언론고시반에 지원할지 말아야할지 기로에 놓였을 때의 심정이 복잡했다.

경제사정 때문에 언론고시 준비 시작을 망설이던 이 때, 좀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이 꿈을 보려고 노력했다.




Photo by Pablo García Saldaña on Unsplash


1) TV의 10년 후가 보이지 않았다.

꿈을 객관적으로 보기로 마음 먹고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TV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이었다. 이미 그 사이 사람들의 TV 시청 시간은 줄어들고 있었고 그 자리를 SNS와 유튜브가 조금씩 넘보고 있었다. 당시에 여전히 TV 의 영향력이 크긴 했지만 이전만 못했다. 조금씩 그 위상이 하락하고 있었다. 문득 20대 초반에 외부 활동을 하면서 만났던 한 다큐멘터리 감독이 떠올랐다. 그는 방송국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감독이었다. 세상이 변했기 때문에 누구든 원한다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느 플랫폼으로든 전할 수 있는 시대였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더 저렴한 가격에 괜찮은 장비를 구입할 수 있는 때였고 여러모로 미디어 진입 장벽이 낮아지고 있었다. 굳이 언론고시가 아니어도 된다고 느꼈다. 내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거면 몰라도, 어려운 상황에서 성장일로의 시장이 아닌 미래가 불투명한 곳에 긴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Photo by Jachan DeVol on Unsplash


2) 더이상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콩깍지가 벗겨졌다. 힙한 트렌드는 인터넷과 SNS가 이끌고 있었다. 그때는 TV를 틀면 이미 한달 전에 온라인 상에서 유행하고 지나간 것들이 소재로 나오고 있었다. 오히려 2019년인 지금은 TV에서도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찾을 수 있지만, 과도기였던 그 당시는 채널을 돌릴 때마다 볼 게 없었다. 거기에 언론장악으로 인한 방송사들의 파업, 일부 언론인의 배신, 변하지 않는 열악한 근무 환경, 각종 성 상품화 등을 보면서 예전에 가졌던 환상이 다 깨졌다. 특히 내가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직후, 세월호 참사가 있었다. 고귀한 생명 대신 온갖 부패하고 무능한 것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중에 방송과 언론도 있었다. 본질에 집중하는 곳도 물론 있었지만, 동시에 확인되지 않은 것들을 경마식으로 보도하며 혼란과 오해를 가중시키는 곳들도 있었다. 내가 아무리 오래 PD의 꿈을 꿔왔다고 해도, 만약 이 상황에 직업을 갖는다면 행복할지 의문이었다. 그 업계 안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상황을 보며, 일부 동료와 선배들을 보며 자괴감과 고통을 느낄 것 같았다.





Photo by Saketh Garuda on Unsplash


3) 고등학생 때 본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따뜻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싶다. "

이 이유로 나는 다큐멘터리 PD를 꿈꿨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어린 내 눈에, 내가 알던 세상에 그걸 할 수 있는 직업이 '다큐멘터리 PD'였던 것이다. 그때 내가 알고 있던 직업은 얼마 되지 않았다. 특히 학교생활과 공부 외에 주로 했던 게 컴퓨터와 TV밖에 없었으니 PD라는 직업이 더 눈에 띄었을 수밖에 없다. 오랜 꿈을 객관적으로 보기로 한 이후, 깨달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꼭 다큐멘터리 PD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세상이 바뀌고 직업도 다양해졌다. 내가 하고싶었던 일의 본질을 그대로 추구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언론고시처럼 길고 긴 준비과정을 거치지 않더라고 뛰어들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았다.





Photo by pan xiaozhen on Unsplash


이렇게 나는 오래 꾸었던 다큐멘터리 PD의 꿈을 접었다.

처음부터 꿈을 접기 위해 객관적으로 보려는 시도를 한 건 아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좋은 점들이 많이 나왔다면 그것을 고된 준비 기간의 원동력으로 삼고 꿈을 이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방향으로 생각해본 결과 그 길은 나에게 딱 맞는 길이 아니라는 결론이 났다.


만약 우리 집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면, 꿈을 다시 볼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면, 나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원래 계획대로 진행했을 수도 있다. TV는 여전히 영향력이 있고, 파업은 끝났고, 방송 업계에는 유능하고 좋은 PD들이 많으며, 근무 환경과 성 상품화 등의 문제도 점차 나아지고 있다. 이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 그리고 꿈꾸는 사람들의 선택을 평가절하하고 싶지는 않다. 멋진 사람들이다.


다만, 그 당시 가난한 학생이었던 내가 치러야했을 기회비용을 생각했을 때

나에게 있어서 PD가 단 하나의 최고의 선택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꿈을 접은 뒤,

다시 길을 찾기까지


8년간 꿨던 꿈을 버리고 정확하게 무엇을 해야할지 정하는 건 쉽지 않았다.

금방 찾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당장 뭔가를 하고싶다는 조급함에, 일단 끌리는 것부터 무작정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느 작은 온라인 매체의 인턴으로 들어갔다가, 친구가 하는 작은 스타트업의 콘텐츠 담당으로 1년을 일했다. 그 뒤 '크리에이터'를 주제로 대학 졸업논문을 썼고 졸업 후에는 운 좋게 취업 준비기간 거의 없이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소속된 MCN 회사에 취업했다. 그렇게 MCN 업계에서 2년 반 가량 일했다. 그동안 학자금 대출도 모두 갚았다.


지금은 새로 생긴 꿈을 이루기 위해 퇴사하고 준비하는 중이다.


결과적으로 보니 고등학생 때 꿨던 꿈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새로운 꿈을 여전히 꾸고 있다.



Photo by Bruno Nascimento on Unsplash


이렇게 명확하게 하고 싶은 게 생길 때까지 4년이,

본격적으로 새 꿈에 도전하기까지 5년이 걸렸다. 꿈을 접었을 때로 부터.


졸업 뒤 사회에 나간 이후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충분히 고민하지 않은채, 경제활동을 위해 무작정 뛰어들었기 때문에 정신적인 방황도 많이 했다. 나 자신을 잃었을 때도 있다. 그래도 그 모든 시간과 경험이 고스란히, 하나도 버릴 것 없이 내 새로운 꿈을 찾는 데 이어졌다.


꿈의 형태는 변했지만, 여전히 그 분야는 미디어다.

나는 스무살에 미디어 전공으로 입학한 이후 한번도 미디어를 놓아본 적이 없다.

남들이 보면 정말 두서없이 뛰어들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모두 미디어와 연관 있었다.



Photo by Héctor Martínez on Unsplash


지금 내가 새로운 꿈을 주변에 말하면, 두가지 반응을 보인다.


하나는, 정말 잘 어울려!

하나는, 정말 완전히 새로운 진로네!


맞다.

내가 그동안 한번도 직업으로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적 없는 직업에 도전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나의 아주 어린 시절부터 돌아봤을 때, 연관 없어 보였던 모든 것들이 퍼즐 조각 맞추듯 끼워맞춰져서 지금 내가 꿈꾸는 일을 향하고 있다.


꿈을 접은지 5년만에, 나는 다시 새로운 꿈을 찾아 내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당신은 어떤 꿈을 꾸고 있나요?

당신의 꿈은 어떻게 변해왔나요?





인생은 상상도 못했던 일들의 연속, 오늘을 즐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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