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육아] 엄마도 엄마의 공간이 필요한데
최근 다시 내 방 병이 도졌다. 대부분의 30평대 아파트는 방이 세 개, 화장실이 두 개다. 아이들이 커서 방을 하나씩 주고 나면 안방이 자연스럽게 부부의 방이 되는데 코로나 시대엔 안방의 역할이 하나 더 생겼다. 바로 재택러의 사무실. 낮에 안방은 남편의 사무실로 쓰인다.
남편과 나는 재택을 동시에 할 때가 잦다. 남편은 매일 화상 회의를 하는 데다, 두 개의 모니터를 사용하는 개발자라 안방에서 일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반면 나는 거의 말을 하지 않거나, 하루 종일 혼잣말을 하며 일한다). 게다가 남편이 재택근무를 시작할 때 회사에서 책상과 의자를 지급해 주었는데, 그걸 안방에 설치한 상황이라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나는 거실에 직사각형 책상(가로 1600cm)을 놓고 일을 한다(거실의 서재화를 꿈꾸며 구입했는데, 그저 바람으로 끝나버려 처치가 곤란해진 책상이다). 처음에는 크게 불편함이 없었다. 내가 거실에서 일하는 게 온라인 수업하는 아이들을 지켜보기에도 나을 것 같았다(물론 중도에 감시를 포기하긴 했지만).
어느새 다 커 버린 아이들은 핸드폰과 먹을 것만 있으면 각자 방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거실에 있어도 일하는 데는 크게 방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코로나가 길어질수록 점점 내 공간이 없다는 사실이 주는 상실감도 커졌다. 남편도 자기만의 방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혼자만의 시간보다는 텔레비전을 보는 것을 더 즐기는 사람이라 그런지 딱히 자신만의 공간을 원하는 것 같지 않았다(어쩌면 혼자 텔레비전을 볼 수 있는 공간을 원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니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혼자만의 방이, 그것이 다만 독방 같은 한 평의 방이라 할지라도 내 공간을 갖고 싶었다. 바깥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어서 내 공간이 더 절실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이 사달이 났다. 별다를 것 없는 평일이었다. 오전에 잠시 온라인으로 회의를 했고, 점심시간이 되자 남편이 차려준 밥을 먹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그랬을까. 나는 또 내 방 타령을 했던 것 같다.
그때 둘째 아이가 말했다. "엄마 방 있잖아." 내 방? 내 방이 어딨어…. 하던 차에 ‘아, 그 방’ 하고 떠올린 그 공간은 안방에서 화장실로 들어가는 입구. 원래 드레스룸이 있던 자리다. 이사 올 때 거기 있던 붙박이 가구를 다 들어내고 화장대와 5단 서랍장을 뒀다. 원래를 윗벽을 다 트려고 했는데, 내력벽이라 철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문은 이미 뜯어내버렸는데... 그래서 문 없이 공간만 덜렁 남은 드레스룸.
불과 얼마 전, 그때도 내 방 병이 도졌을 때 사방이 110 cm 정도 되는 그 작은 곳에,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미니 테이블을 놓고, 의자도 갖다 두었다. 그걸 아이가 '엄마 방'이라고 부른 거다. 문도 없는 방. 그런데 놀리듯 말하는 아이의 말에 울컥 눈물이 났다. 나도 모르게 갑자기 눈물이 터져버렸다. 갖고 싶은 장난감을 사주지도 않으면서 거기 비슷한 거 있지 않냐는 말을 듣는 기분이 이런 건가(혹시라도 아이에게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 이 나이에, 엄마가 되어서도 서러웠다.
아이가 엄마 방이라고 부르는 그곳에 정작 나는 잘 가지 않았다(글을 쓰는 지금도 남편 책상). 오히려 아이가 숙제할 때 더 많이 이용하곤 했다. 집중이 잘 된다면서. 이런저런 심란함에 작업실을 구할까 생각도 해 봤다. 그러다가 지역에 있는 동네 작가들이 함께 쓸 수 있는 공유 작업실 같은 게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들끼리 아이디어도 공유하고 글도 쓰고 교류하면 좋지 않을까. 그런 게 있다면 내 방 타령하지 않고, 열심히 쓸 텐데...(과연 그럴까). 하루는 이런 상상을 하고, 또 하루는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쓰겠다고 작업실 타령인가 하는 마음이 왔다 갔다 했다.
내 방 그까이거 그냥 포기하면 좋을 텐데 그 포기가 잘 안 된다. 어쩐지 내 방만 있으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자꾸만 나를 툭툭 건드린다. 기분 나쁘게. 나쁜 기분을 없애려고 방법을 찾다가도 간절하면 어디서든, 언제든 쓰게 된다는데 나는 간절하지 않은 걸까? 하는 마음도 든다(지금도 남편 책상에서 잘만 쓰고 있잖아).
주말 오전에 카페에서도 2시간씩 쓰고(오미크론이 심해지면서 이 루틴은 일시정지 상태) 그러면 된 거 아닌가, 싶다가도 마음 한편에 남은 구멍에서 들어오는 바람은 어쩔 수가 없다. ‘냉방병’에서 ㅇ 하나 빠진 내 방 병인데, 냉방병에 걸린 것처럼 코를 자주 훌쩍이고 숨쉬기가 답답하다(어딘가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 건 그냥 기분 탓이겠지?).
번역가 정수윤의 책 <날마다 고독한 날>에도 작업실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작가도 지금의 작업실을 구하기 전, 카페부터 공유 작업실을 전전했던 모양이다. 그때 만난 사람들이 불행배틀이라도 하듯 고민을 털어놓았던 시절을 소환하는데 저마다의 고민과 하소연은 결국 “애태울 바엔 각자 작업이나 합시다”라는 말로 마무리되었다는 이야기. 그러면서 작가는 일본 와카(일본 옛사람들이 쓴 시, 하이쿠도 와카에서 왔다고 한다)를 소개한다.
‘애태울 바엔 잠이나 잘 것을 밤은 깊어서
기울어 넘어가는 달만 보고 있구나’
그 옛날 바람둥이 남자에게 휘둘리는 여동생을 보며 언니가 한 노래란다. ‘그런 남자를 애태우며 기다릴 바에는 잠이나 자라. 세상엔 되는 일도 있고 안 되는 일도 있는 법이다’라고 쓴 작가의 설명 문장을 읽으며, 비록 애태우며 기다리는 남자는 없지만 비슷한 심정이 든다. 작업실 애태워할 바엔 잠이나 자자는, 그럴 시간에 작업이나 하자는 그런 마음.
작가는 말한다. 세상엔 되는 일도 있고 안 되는 일도 있는 법이고, 간절히 원해도 안 되는 일이 있으며, 간절히 원해서 갑자기 되는 일도 있다고. 작가의 말대로라면 아직 나는 안 되는 중이다. 그런데 '혹시 모르겠다'는 희망도 동시에 생겼다. 간절히 원해서 갑자기 되는 그런 일이 내게도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때가 언제일지 알 수가 없으니 일단 잠이나 자자고, 한 개의 글이라도 더 끝내자고 오늘도 나는 나를 다독이며 쓴다.
- 베이비뉴스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