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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써준 것 같은 문장들

[편집기자의 온] 좋아하는 문장 필사하기

by 은경

내가 썼나 싶은, 내 마음을 읽었나 싶은 글을 볼 때 나는 좌절한다. 나도 그 사람의 글로 태어나고 싶다. 사람이 아닌 문장이 부럽다.


사람의 고민이란 대개 다 비슷비슷하다는 것도 이 일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20년 넘게 이 일을 하면서 생애주기별로 다양한 고민이 있었다. 직장 생활에서 일어나는 고민, 결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의 시기를 관통하면서 하는 고민, 가깝게는 사춘기 아이들의 이해, 교육, 입시 등등... 신기하게도 내가 어떤 고민을 하면, 누군가 그 이야기를 써서 기사로 보냈다. 마치 나 보라는 듯. '나는 그런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그러니 너도 그렇게 힘들어 할 필요 없다는 말을 해주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인생의 지혜였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모두 상담사 같았다. 내가 일부러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너를 위해 준비했어,라는 듯 나에게 가장 먼저 깊은 이야기를 들려줬으니까. 그 글들로 '그래, 괜찮아' 하고 지나갈 수 있었다.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용기 낼 수 있었다. '그래 내 탓이 아니야'라고 회복할 수 있었다. 잠시 비가 오는 거라고, 곧 날이 개일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게 나는 너무 고마웠다. 그런 글들을 보게 되는 날은 아까워서 일부러 적어뒀다. 글값이 있다면 치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으니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고마움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영감노트에 적어두기 시작했다.

이 영감노트는 내가 입사 20년이 되는 해에 후배가 선물로 준 수제노트다. 꽤 두껍고 나름 중요한 일만 적어서 그런지 아직도 3년째 쓰고 있다. 사실 이렇게 두꺼운 노트를 한 번도 꽉 채워 쓴 적은 없는데, 이 노트만은 꽉 채워서 그 후배에게 다시 보여주고 싶었다.


덕분에 이렇게 많은 영감을 적을 수 있었어, 덕분에 이렇게 많은 생각을 흘려버리지 않을 수 있었어, 덕분에 꽤 많은 생각들을 모았다가 글을 쓸 수 있었어, 덕분에 끊길 듯했지만 끝내지 않고 계속 쓸 수 있었어, 덕분에 외부 원고료도 많이 모았어, 덕분에 항상 나를 돌아보며 살 수 있었어. 덕분에 항상 감사하며 쓸 수 있었어,라고 말해주고 싶어서.

적어둔 글을 들춰보니 그때의 기억이 난다.


할 만한 것만 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무모한 것 같지만 한 걸음 내디딜 때 내가 볼 수 있는 시야도 넓어진다. - 김지은 시민기자.


>> 2023년 1월에 읽은 이 문장은, 나에게도 필요한 말이었지만 당시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되는 1호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별로는 축구를 잘하는 사람은 개인기로 상대를 돌파하는 선수가 아니라 패스해야 할 시기에 얼른 공을 남에게 넘기고, 곧이어 다시 패스받을 자리에 가 있는 이라고 했다. 내가 할 수 없을 때는 동료를 믿고, 동료가 힘들 때는 얼른 그리로 달려가 도울 준비를 해야 한다. 상대를 믿지 못하고 혼자 돌파하려다가 역습을 당하면, 그 모든 책임을 나누어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민폐가 어디 있겠나. - 이지은 시민기자.


>> 축구에 대한 이야기의 일부였는데, 나에게는 일에 관한 이야기로도 읽혔다. 일할 때도 통용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나는 어떤가, 생각해 보게 되는 문장이었다.


이야기는 살아있다. 이야기는 이야기로 연결된다. 사람과 사람의 삶은 연결되어 있기에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건, 나와 비슷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대신한다는 말과 같다. 이 넓은 세상 어딘가에는 나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누군가가 한 명이라도 있기 마련이다. 그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이야기로 연결된 누군가와 공감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 박순우 시민기자.


>> '나와 비슷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대신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니 누군가는 반드시 공감할 것이라는 말이, 글을 쓸 용기를 주었다.


"세상에는 첫눈에 반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두 번 세 번 봐야 반하는 것도 있다. 나에겐 무화과가 그랬다. 그 후로 나는 뭐든 세 번은 더 보자는 주의가 됐다. 그 무엇인가가 달라질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가 어떻게 달라질지 나도 모르니 나에게 기회를 주고 싶기 때문이다." - 오세연 시민기자.


>> '나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고 싶다'는 말이 새롭게 들렸다.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구나, 싶은 문장이었다. 그럴 기회가 생기다면 나도 한번 그래보고 싶었다.


몸과 마음이 차가워지는 날, 이곳 목욕탕에 오게 될 것이다. - 이유미 시민기자.


>> 몸과 마음이 차가워지는 날 나도 목욕탕에 가고 싶어지는 문장이었다. 뜨끈한 38도 온탕에 몸을 깊이 담그면 차가워진 몸도 마음도 풀어지겠지. 집 근처에 목욕탕이 있다는 게 이렇게 소중한 거였구나, 새삼 감사했다.


꾸준히 매일 하면 좋겠지만 사실 일을 하다가 갑자기 필사를 하기란 쉽지 않고, 일을 끝낸 후에 하기도 쉽지 않다. 드문드문 그럴 여건이 되고, 그럴 만한 글이 보이면 적어두려고 애를 쓸 뿐. 그래도 이 일을 하는 한은 계속 적을 것이다. 지혜로운 문장가는 언제나 등장하는 법이고 당신에게 공감하는 그 단 한 사람이 나라고, 그러니 계속 쓰라고 말해주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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