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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이도 놀 수 있는 사람

[편집기자의 오프] 도예가 놀이와 문화자생력

by 은경

후배가 요즘 '인급동'이라면서 한번 보라고 한 동영상에 이런 말이 나온다.


https://youtu.be/AqEN8qOcAcA?si=7ptCPWOeznAzV10d


"진짜 중요한 자기개발 두 가지. 하나는 우리 한국 사람들의 인생을 보면, 어렸을 때 내 인생을 내가 알아서 사는 법을 별로 못 배웠어요... 그래서 자기 식사 못 차려 먹는 사람들이 되게 많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라이프 스킬이라고 하는 것들을 공부할 시간이 많이 없었어(주방에서 뭐 좀 하려고 하면 엄마가 그 시간에 공부나 하고 말려. 미국에서 자동차를 기본으로 정비할 수 있는 것들을 어릴 때 배우는 것 등), 문화자생력이 너무 떨어진다. 그게 뭐냐면 돈을 주고 누구한테 ‘나를 놀게 해 주세요’라고 얘기 안 해도 그 놀이판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말하거든요. 어릴 때 노는 방법을 못 배운 애들은, 춤출 때도 누가 만든 공간 가서 돈 내고 놀고, 친구와 시간 보낼 때도 돈 주고 카페 가서 보내야 한다. 인생의 즐거운 어떤 일이 전부 다 돈의 어떤 구름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돈에 집착을 할 수밖에 없고. 거기서 나를 해방시켜 줄 수 있는 것은 문화자생력. 그래서 나는 라이프스킬과 문화자생력이 합쳐졌을 때 가장 강력하게 나를 시지프스의 굴래에서 해방할 수 있다."


이 말을 듣는데 갑자기 내가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에게도 있는 거 같았다. '문화자생력'. 나 돈 없이도 잘 놀 수 있는데... 그건 지영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중에서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건 꿀잼. 그 이야길 해봐야지.

도예가 최 선생님이 된 순간.

어쩌다 내가 "최 선생님"이라는 아티스트가 되었나 모르겠다. 그날따라 차려입은 항아리 스타일 바지 때문일까? 아니면 물 빠진 황토색 같은 바람막이 잠바 색깔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콘크리트 건물색 때문일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언니가 나를 "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작품도 가마도 없는 도예가 최 선생님이 되었다.


https://brunch.co.kr/@okbjy/604


언니가 나를 최 선생님이라고 부르자, 최 선생님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말투나 걸음걸이가 다 조심스러웠다. 언니는 보기보다 섬세한 눈을 가진 사람. 이런 나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핸드폰 카메라를 들어야 할 순간과 말해야 할 순간, 들어야 할 순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 진짜, 언니, 뭐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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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갤러리 홍보 동영상 같은 무빙으로 나를 카메라에 담았다. 나는 방명록에 언니와 내 이름을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안 보다 밖을 눈과 마음에 더 담고 싶어서. 나무와 숲의 그 흔들거림이 어찌나 아름다운지(여행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말못.

내가 전시회장 밖으로 나온 사이 언니는 동화작가답게 스토리텔링을 이미 끝내놨다. 아티스트의 퇴근과 그 아티스트가 앉은 의자마저 소중히 기록하고 싶은 팬의 마음이라며 촬영한 영상을 보여줬다.


그러면서 말했다. 아티스트도 퇴근하고 싶은 마음을 몰랐지 뭐야. 이, 언니 아티스트 놀이에 진심이네. 나는 그저 바람에 나부끼는 나무와 숲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 퇴근이 급한 아티스트로 만들어버리다니. 작가는 작가네.

아티스트가 떠난 자리.


그러고 보니 도예가 아티스트가 될 자격이 있었다(자꾸 진지해지는 나). 작년에 달항아리도 하나 구입했고, 좋아하는 일러스트 작가 그림도 하나 구입했다. 마음만 먹으면 집 앞에 있는 도예 공방(운명인가)도 다닐 수 있으니, 언니의 스토리텔링이 영 말이 안 되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언니가 판 깔아놓은 아티스트 놀이는 카페를 나와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도 이어졌다. 하필 한길문고 근처에서 도예공방 하나가 폐업 세일 중이지 뭔가. 그걸 본 내가 "저기 공방 폐업하네... 이렇게 살기가 어려운데, 도자기 만들어서 뭐 하냐고. 놀러나 다녀야지"라고 말했고, 언니는 또 배꼽을 잡고 웃었다. 이 동네 살면서 있는지도 몰랐던 공방이 어찌 최 선생님 눈에는 보이냐면서. 허허, 그러게 왜 나한테 눈에 띄는 것이냐.


도예가 최 선생님을 서울로 보내놓고도 언니는 걱정이었나 보다. 잡무와 새로 나온 책 사인회 등으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겨우 책상에 앉은 날, 톡을 보냈다.


"이따가 1시 반에 또 약속. 도예가 최 선생님한테 보낼 흙은 언제 푼담? ㅎㅎ"


톡을 받고 잠시 생각했다. 이 이야기 안 끝나는 건가? 계속 되는 건가? 웃음이 삐죽삐죽 나왔다. 계속 해도 재밌을 것 같았다. 뭔가 찔렸는지 언니가 톡을 바로 보냈다.


"조예가 덜 깊은 도예가. ㅎㅎ"


최 선생님, 자존심에 스크레치가 심하게 났다. 급하게 되받아쳤다.


"왜 이래? 나 달항아리 보유자야!"

"소유에 대한 조예는 깊으심. ㅋ"


또 웃었다. 당했다. 못 말린다. 도예가 최 선생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며칠 후 르클래식 소금빵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고3 아침으로 차렸다. 놓치지 않고 영상으로 남겨 언니에게 자랑했다.


르클래식 소금빵으로 만들어본 샌드위치.

"오늘 아침 고3 밥. 물레질 안 하고 (프라이)팬 질만 하네. ㅎㅎㅎ"


언니가 즉답했다.


"오, 최 선생님 잘하네요. 입시 끝날 때까지 작품 활동 쉬셔도 뭐라 못하겠어요. ㅋ"


어쩐지 언니랑은 돈 없이도 놀 수 있을 것 같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서 그럴까. 시골에서는 뭐든 놀이가 된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들, 언니가 좋아하는 것들을 동화에도 하나씩 넣어뒀다고 했다. 가령, 이번에 나온 동화 <학교 운동장에 보름달이 뜨면>에 등장하는 도둑게 이야기 같은 거. 그래서 쓰면서도 재밌었다고.


언니와 함께라면, 월명산 걸으면서 춤을 출 수도 있을 것 같다. 맨발로 걸을 수도 있다. 노래도 부를 수 있을 것 같고. 드라마 대본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상황극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야기하다 지치면 달릴 수도 있을 것 같고. 저기를 작업실로 하자면서 동네 투어를 다닐 수도 있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언니와 나는 문화자생력이 너무 풍부한 것 같다. 함께 놀고 싶은 사람, 여기 여기 붙어라.

맨발 황톳길. 이 또한 돈 없이도 누릴 수 있는 재미.

도예가 놀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주말에 맨발 걷기 하다가 끝내주는 흙을 발견했다. 역시 수리산이여. 기쁜 마음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언니한테 이 사진을 보내면 뭐라고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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