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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만원짜리 중고차

"차가 있어야겠어."


내가 한 얘기가 아니라, 아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참고만 하시라, 예전에는 내가 <여보, 차 바꾸면 안 될까?>라고 물었었다.)


내가 복직을 하게 되면 아내가 출근을 하면서 아이를 어린이 집에 데려다주고 출근을 해야 하니 미리 운전 연습 겸 차를 사야겠다는 아내의 얘기였다.


우리 아이는 집에서 차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아내의 직장 어린이 집에 다닌다. 직장 어린이 집이지만 아내가 일하는 사무실은 또 어린이 집에서 차로 25분에서 30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내가 운전을 잘 못하니까 막 여기저기 받아도 부담은 없는 그런 차면 좋겠어. 그리고 우리 회사 건물 주차장이 기계식인데 오래됐나 봐. 큰 차는 안된다고 하던데……. 아이도 타야 하니까 어느 정도 안전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솔직히 그냥 너무 못생긴 차는 싫어. 그런데 돈은 너무 쓰지는 못할 것 같지?"


조건이 많은데, 돈은 많이 못쓴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차를 찾아내야 한다. 참, 어려운 미션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남자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유 없이 중고차 사이트를 뒤적거리는 일을 나는 괜히 좋아한다. "지금 차를 팔아서 살 수 있는 차는 뭐가 있을까", "그래 중고니까 이 정도는 급을 올려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쇼핑의 즐거움이 있는 행위를 종종 즐기고는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실전이다. 내 안목에 안목에 안목을 더해서 고르고 고르면, 실제 구매까지 이어질 수 있는 찬스인 것이다. 온라인 게임에서 연습하던 스킬을 실제로 써보는 그런 순간이라고 해야 하나.


아내가 내게 준 예산은 500만원이었다. 500만원 안에서 막 받아도 부담은 없지만, 못생기지는 않았고, 아이도 탈만큼 크고 안전하되, 나름 스타일리시한 그런 차를 찾아야 했다.




필터에 필터에 필터를 거쳐 고르고 고르니 대략 3~4대 되는 차가 남았다. 집에서 쉬고 계시는 아버지와 차 구경을 핑계 삼아 날을 잡고 차를 모두 보기로 했다. 일산, 김포, 수원을 돌고 도니 하루가 그냥 사라져 버렸다. 가장 맘에 두었던 차는 전문 정비사를 고용해서 두 시간 가까이 열고 비추고 점검까지 했다. 


그리고 그날 밤, 꿈을 꾸었다. 


계약서에 사인을 마치고 차를 가지고 매매상사 주차장에서 나오는데, 차바퀴 네 개가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는 꿈이었다.


며칠을 아내와 얘기를 주고받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결국 정비사와 함께 본 그 차를 사기로 결정했다.


12년식인데 무려 26만 킬로를 달린 300만 원짜리 북유럽 V사의 수입차. 정확하게는 390만원짜리 중고차였다. 안전의 대명사라는 브랜드라니 중고라도 안전하겠지라는 내가 만든 믿음에 빠져버린 것 같았다.




"차를 인수하시면 타이어 하나랑 오일 정도만 갈면 크게 손 볼 데는 없을 것 같아요. 워낙 많이 달려서 약간 소리는 날 수 있는데 다행히 관리는 잘된 차로 보여서 큰 걱정은 없을 것 같습니다."


차를 요모조모 살펴보던 정비사님의 말을 믿기로 했다.


"뒷좌석 잠금장치가 둘 다 고장일 거예요. 워낙 싸게 파는 차라 그건 수리 안 해뒀어요." 


차를 판 매매상사의 사장님의 말에는 "그래, 잠금장치 따위야. 훔쳐갈 귀중품 따위 두지도 않을 거다"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각종 취득세와 중고차 매도비와 알선료라는 온전히 중고차 매매상의 수입을 위한 비용까지 더해지니 자동차 값은 500만원 가까이 되어있었다. 


이미 충분히 검색해서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아내가 제시한 500만원 안에서 괜찮은 차를 골랐다는 기쁨이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다행히도 390만원짜리 중고차는 김포에 있는 매매상사에서 잠실에 있는 우리 집까지 아무 문제 없이 달렸다.




견물생심이라고 했던가. 정말 딱 500만원에 오일류만 교환해서 타기로 마음먹었던 중고차를 조금씩 고쳐나가는 일은 너무도 재밌었다. 


와이프와 아이가 탈 찬데 제대로 고쳐서 타게 하자는 생각이 갑자기 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엔진오일과 연료 필터만 교체하려던 소모품도 집 근처 정비소에서 한 번 정비를 맡기고서는 싹 갈았다. 

안전을 위해서니까 하고 나를 다독였다. 


타이어는 당연히 갈았고. 

안전을 위해서니까 하고 나를 다독였다. 


앞유리 선팅과 블랙박스도 교체했다. 

역시나 아내 피부의 안전을 위해서니까 하고 나를 다독였다. 


차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다는 생각에 탈취 클리닝도 맡겼다.

우리 아내와 아이의 폐건강을 위해서니까 하고 나를 다독였다. 


그리고 뒷좌석 잠금장치도 고치기로 했다. 

문 열고 닫을 때 정신건강을 위해서.


그렇게 500만원에 사 온 390만원짜리 중고차는 어느덧 700만원짜리에 가까운 차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이를 태우고 처음으로 어린이 집에 데려다준 날, 우리는 이 차를 엄마차라고 부르기로 했다.

원래 우리 부부가 결혼하고 나서 산 차는 아빠차가 되었다. 


아이는 이 700만원 가까이 되어 버린 390만원짜리 엄마차를 매우 좋아한다.


어디를 가건 아이와 함께 움직일 때 아이는 항상 "엄마차! 엄마차!"를 타자고 조른다.


덕분에, 몇 배 더 비싼 아빠차는 요즘 주차장에서 자리만 지키는 중이지만,


또 덕분에, 700만원이 되어버리도록 고치고 수리하는 일이 헛짓이 아니라는 방증 같아 안심하고 있다.


390만원짜리 엄마차야, 잘 부탁한다.

제발 몇 년만 고장나지 말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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