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37.
그는 지쳐가고 있었다. 슬럼프가 찾아왔다. 아이와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고 24시간 온종일 붙어 다닌다는 것은 한편으론 외로움과 쓸쓸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엄마들에게 왜 육아 우울증이 오는지 짐작이 갔다. 아이와 수많은 대화가 오고 갔지만 그리고 어찌 보면 평생토록 주고받을 이야기를 이어갔지만 그는 어른의 눈높이에 맞는 성숙한 대화가 몹시도 그리웠다.
아이가 옆에서 쉴 새 없이 "피슝 피슝!" "빠쇼빠쇼!" 대는 통에 어떤 때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밖으로 뛰쳐나가 괴성이라도 한 판 질러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정신없는 공상. 과학. 액션. 만화의 세계에서 벗어나 사람과 사물의 정지된 묵음과 사건과 사고를 이성적으로 연결하는 관조적 저작이 그에게는 절실했다. 남자아이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런 류의 감탄사를 온종일 견뎌 내기 위해선 진짜로 제대로 된 목사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저 자신도 모르게 쏟아져 나오는 잔소리는 그의 감춰진 욕구를 투사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디선가 터지는 법. 그것도 꼭 연약한 부분에서 터지기 마련이다. 그날도 그랬다.
그는 아침부터 자고 있는 아들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몹시 짜증이 났다. 전날 일찍 자라고 그렇게 재촉했는데 알았다며 안경을 휙 벗어던지던 아이의 태도가 몹시 거슬렸었다. 꼴도 보기 싫었다.
"샤워부터 할게!"
"그래라!"
막상 샤워하러 들어간 아이는 세월아 네월아 나올 줄을 몰랐다. 휘파람을 불며 늑장을 부리는 통에 머리에서 김이 새기 시작했다. 기차 시간에 맞추려면 더 빨리 서둘러야 하는데 아이는 한결같았다. 잔소리를 피하려고 아무리 작정을 해도 그의 신경망은 훨씬 빨랐다.
"제발! 제발 좀 해! 응! 얼른 해!!!"
막상 이렇게 뱉고 나면 복부에 꽉꽉 묵혀둔 대사가 봇물 쏟아지듯 터지기 마련이었다.
"너! 내가 어젯밤부터 그렇게 이야기했지! 아침에 피곤하니까 일찍 자라고! 이런 일이 한두 번이야! 내가 그렇~게나 이야기했거늘!..."
그들은 숙소를 나섰다. 겨울 아침의 어두운 적막이 아직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스걱~ 스걱~ 스걱~ 스걱~"
'걸어 다닐 때 그렇게나 신발 끌지 말라고 했거늘...'
하지만 그는 어떻게 하면 건전(?)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잠시 동안 고민했다.
"내가 짐 좀 들어줄까?"
나름 연구해서 잔소리를 피하고자 건 낸 대화였다. 신발 끄는 것을 좀 알아차리라는 뜻이었다. 아이는 한 손에 기차에서 먹을 먹거리 봉지를 들고 있었다.
"아니, 괜찮아!"
"아빠~ 그러면 내가 아빠 가방 들어줄까?"
"아냐~ 괜찮아"
"아빠!"
"왜! 왜! 왜 또!, 또!!!, 그다음엔 내가 아빠 고추 들어줄까? 그러려고 했지!!! 응? 다 알아~!"
아이가 틈만 나면 그에게 던지는 농담이었다.
"아빠!"
"왜?"
"그 어느 날..."
"그래! 어느 날?"
"너와 내가..."
"그래! 너와 내가?"
"심하게 다툰 후로~"
"...!"
"너와 내 친구는 연락도 없고~~~~"
"에잇!~"
그래도 아이는 노래를 이어갔다. 그만하라고 지겹다고 그렇게나 이야기를 해도 그때뿐이었다. 틈만 만나면 던지는 즐겨 찾기 농담 2였다.
"아빠?~
"..."
"야!"
"왜??? 왜! 왜! 또"
"수영장~~~~"
"속았지, 속았지~~~"
여기 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농담 시리즈는 그나마 참을 만했다. 하지만 아이의 신발 끄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얼마 전에 너덜거리는 샌들을 버리고 새 신발을 하나 사줬는데 바닥을 질질 끄는 것이 꽤나 마음에 거슬렸다. 저러다 닳지 싶어 재정적으로도 버겁게 느껴졌다. 그는 여행 중에 젓가락 잡는 것과 발을 질질 끄는 것만큼은 꼭 고쳐줘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야! 신발 끌지 말라고~ 바로 걸으면 되잖아! 너도 한번 봐봐. 지나가는 사람들 걷는 것 좀 봐봐. 너처럼 끌면서 걷는 사람이 누가 있니!"
"내가 언제 끌었다고 그래? 이거, 짐 부딪히는 소리야!"
그는 마음이 확연히 깜깜해지고 있었다.
"아이~ 진짜!"
"그럼, 아빠가 이거 들어!"
그는 이제 먹통이 될 지경이었다. 며칠 전 밥을 먹기 전에 "식사 기도는 누가 할까?" 했는데 아이가 "아빠!"라고 했다. 기도 했다. 아이는 그 기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의 기도가 끝나고도 혼자서 다시 길고도 긴 가족의 안녕과 평안을 비는 기도를 이어갔다. 그것도 통성으로 하는 통에 그의 기분은 온통 상했었다.
역전 아침 식당에서 만두 한 접시를 시켰다. 그때와 마찬 가지로 아이는 가족의 안녕과 평안을 비는 기도를 매우 큰 소리로 바치고 있었다. 힘겨웠다. 결국 그는 만두 몇 개를 집어 먹다 말고는 테이블에 젓가락을 내리쳤다.
"야, 너! 신발 끌지 말라고 했더니 그럼 아빠가 들어!? 그게 할 소리야! 잔소리 듣기 싫으니까, 그럴 거면 너는 이거나 들고 있어라? 이거지! 그게 지금 말이라고 하는 소리야!"
"알았어, 알았어! 잘못했어,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아이도 사태를 짐작했는지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는 것을 힘겨워했다. 그래도 한껏 격앙된 그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또다시 혼자 식 설교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역전은 이른 아침부터 붐볐고 역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번잡했다. 기차표와 신분증을 제시하는 긴 줄에 서서 이것저것 보여주고 검문대를 통과하며 다시 짐 보따리를 챙기려다 보니 손이 모자랐다. 그는 아이를 잽싸게 노려 보았다.
"야, 이럴 때는 바지에 두 손을 팍 집어넣고 있을게 아니라~ 아빠, 좀 들어줄까, 그러는 거야! 응!!!"
'너는 사랑을 기도로만 하냐?'
이 이야기는 차마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구구절절이 아이를 질책하고 있었다.
객차는 출구 맨 앞쪽에 있었다. 승강장을 따라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탑승 객차 앞에서 승무원에게 표를 들이밀었다. 그런데 티켓을 확인한 역무원이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아이가 크다는 것 같았다. 자리에 앉았지만 찜찜했다.
사실 발권할 때 이것이 문제가 될까 봐 살짝 우려하기도 했었다. 웬일인지 쿤밍 역에서 소인표를 끊어줬다. 표 끊는 통로에서 아이가 다리를 길게 옆으로 벌리고는 꼬마 같은 연기를 했는데 매표소 직원이 고개를 길쭉하게 빼서 보고서는 떡 하니 소인 표를 끊어줬다. 그는 잘됐다고 속으로 좋아라 했었다. 반값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열차가 출발하고 승무원이 한두 번 더 다가왔다.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하는데 결국 아이 표에 문제가 있다는 거였다. 그는 영어로 유창하게 떠들면서 못 알아듣는 연기를 했다. 결국 영어를 구사하는 특수요원을 보내왔다. 여자 승무원은 1.60m은 족히 넘을 아이를 소인 취급할 수는 없다며 추가 요금을 요구했다. 아이는 여행 중에도 키가 한 뼘은 자라 있었다.
12살까지는 소인이 아니냐고 주장할 수 있었지만 중국에서 버스, 기차, 극장 할 것 없이 1.4m 이상은 무조건 일반인 취급을 했다. 그래도 한번 노력해 보기로 했다.
"그럴 거면 애당초 성인 표를 발급했어야지 왜 소인권을 끊어줬나?"
그는 매표소 당국의 과오를 지목했다. 게다가 기차 안에서 발권하면 추가 수수료를 내야 한다는 것이 불편했다.
"티켓을 판 것은 그쪽이다. 수수료까지 부담하는 것은 좀 부당하지 않느냐?"
계속해서 맞섰다. 그녀는 그게 중국 법이라고 심심한 양해를 구했다.
"그러면... 자기네가 사비로 수수료 절반을 부담할 테니 손님이 나머지를 부담하시면 어떻겠는가?"
마지막에는 이렇게 까지 이야기했다.
"... 이왕 추가 요금을 낼 거, 그렇게... 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그가 말했다. 그래 봐야 수수료 2원 중 1원을 더 아끼는 것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그 돈도 너무 아쉽고 아깝고
안타깝고 아팠다. 신지에의 아련한 추억이 떠올라서 더 이상 쩨쩨하게 구는 것도 더없이 창피하고 구슬펐다.
역무원들은 그렇게 그의 곁을 떠나갔다. 하지만 차 안에서 고개를 쳐 박고 잠들어 있는 아이를 바라보는 그의 분통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기차가 점점 달릴수록 그의 속은 팍팍 문드러져 가고 있었다.
"아호~ 그냥, 이걸~ 아주 그냥 팍! 으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