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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투툼 appatutum Jul 26. 2016

'애사심'이 상사에 대한 충성? 그건 아니지

[나는 고졸사원이다 61] 상대적 빈곤

"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 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 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 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 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에서

                                                                                    

▲ 경쟁 조직이 통폐합되면서 각 부서 간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회사의 조직 개편으로 인해 지역별 개별 방송국 체제에서 비슷한 지역의 방송국 2~3개를 묶어 '본부' 단위 운영 체제로 바뀌었다. 내가 소속돼 있던 김해 지역은 경상남도 관할 구역 내에 있던 창원·마산지역 방송국과 1개 본부로 통합됐다. 그중 지자체 제일 상위 기관인 도청에 가까이 있는 방송국이 중심지가 됐고, 우리는 순식간에 '굴러 온 돌' 취급을 받았다.


우리 회사는 전국 곳곳에 지역 방송국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중 내가 소속된 김해 지역 방송국은 그중에서도 맨파워가 좋고 실적 좋은 방송국이었다. 당시 전국적으로도 우리 지역 방송국이 다른 지역의 '표준'이 될 정도로 위상이 높았다. 


지역 케이블 방송 사업에 대기업이 진출하면서 각 지역에 있는 케이블 방송국을 인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인수 시기에 따라 해당 방송국 근무자들의 처우가 크게 차이나기도 했다. 대기업이 인수하기 이전부터 쭉 이 업계에 몸 담아온 사람들은 인수 당시 운 좋게 대우를 잘 받기도 했고 다른 동료들보다 못 받기도 했다.


나는 이미 대기업이 인수한 이후에 입사했다. 하지만 그 여파는 내가 입사할 때까지도 영향을 끼쳤다. 우리 지역 방송국은 창원에 있는 방송국보다 대기업에 늦게 인수가 됐다. 그 덕에 인수 조건 협상에 요령이 생긴 대기업에서는 창원 직원들과 비슷한 경력을 사진 사람들에게 인수 조건을 까다롭게 만들어 연봉과 직급을 깎아 버렸다. 그 이후 입사하는 신입 사원들은 기존 사원들과의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더욱 처우가 좋지 못했다. 소위 말해 '꼬인 군번'인 것이다.


김해 지역 근무자들은 창원 지역 근무자들보다 불리한 조건에 계약을 체결하게 됐지만, 서로 얼굴 볼 일 없이 개별 방송국별로 별도 운영했기 때문에 큰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조직의 통폐합으로 인해 평소 수평관계로 지내던 사람들과 순식간에 수직관계가 되기 시작했고 상대적 빈곤으로 허탈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김해 지역에서 나와 함께 구매·자재 업무를 담당하는 팀원은 나를 포함해서 총 4명이었다. 까다로운 팀장 탓에 우리는 항상 바쁘고 힘들었다. 가끔 팀장이 창원 방송국 팀장과 미팅이라도 하고 오는 날이면 우리를 불러 모아놓고 '창원에는 이리저리 하던데 너네는 어떻게 하고 있냐'라면서 경쟁을 부추겼다. 


가까운 지역의 팀장들 간에 신경전이 있었고 서로의 팀이 잘하고 있다고 자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밑에 있는 팀원들도 서로 간 소통을 하기 시작했다. 몇 차례 미팅을 가지다 보니 우리보다 훨씬 높은 직급의 담당자들이 구매·자재 업무를 하고 있음에도 제대로 된 프로세스가 확립되지 못한 창원 지역의 상황을 알게 됐다. 하지만 '내 집 살림'이 아니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문제는 조직 통폐합 이후 김해와 창원이 한 본부장 소속이 되고 난 뒤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각 지역의 팀장들은 본부장에게 자기가 맡고 있는 팀의 업무가 더 잘 되고 있는 것이라면서 어필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우리의 경쟁 구도는 나날이 심해져갔다. 그 경쟁 구도는 결국 우리에게 화살이 돼 돌아왔고, 일 하나는 확실하게 해치우던 우리 김해 방송국 사람들은 직급이 더 낮은 사람들임에도 큰소리 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직급'보다 '실력'이 인정받는다고 생각할 때쯤 조직은 또 한번 통폐합되었고 같은 업무를 담당하던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줄어든 인력으로 많은 업무를 처리해야 하다 보니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들을 우선으로 해야 했고, 그로 인해 각 담당자 간 역량 차이에 대한 변별력도 점점 사라져갔다. 


결국 실력으로 큰소리치던 우리는 직급에 밀려났고 수시로 바뀌는 부서장과 본부장들은 우리의 히스토리나 역량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앞에서 기분 좋은 소리 하는 사람들만 싸고돌았다. 몇 년이 지나 창원과 김해가 통합돼 살아남은 사람들은 김해 사람들이 많았지만 맨파워 좋기로 소문난 김해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정치'에 눈먼 사람들만 가득했다. 나중엔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은 정도였다.


'실력'으로 인정받던 시절은 끝나버렸다


▲ 평가 조직이 커질수록 점점 평가에 대한 변별력은 떨어졌다 


조직이 통폐합되고 내가 맡은 업무에서 어느 정도 베테랑이 되었을 무렵 나는 해야 할 일을 제때 하지 않고 놀아야 했다. 그렇게 놀면서도 항상 연말 고과 평가는 괜찮게 받았고 그에 따른 시기와 질투도 감내해야 했다.


나는 김해에서 일할 때처럼 일했다. 하지만 창원 지역에서는 시행하지 않던 일이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방법을 몰라서 못하고 있던 일이었다. 처음 조직이 합쳐지고 김해에서 시행하던 프로세스를 창원 지역에 적용해서 실상을 파악했을 때 회사는 엄청난 손실을 감내하고 있음이 표면적으로 드러났다. 그때부터 나는 그들과의 역량 차이를 윗선에 확실히 보여줄 수 있었다.


나는 일상적으로 진행하는 업무 외에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을 좋아한다. 항상 새로운 시각으로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다 보면 평소에 몰랐던 새로운 길이 보이기도 한다. 그 일이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조직 통폐합 이후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업무조차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던 동료들이 한 팀이 되면서 나는 그들의 '진도'를 맞추기 위해 새로운 일을 만들지도 않았고 해야 할 보고를 일부러 누락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팀장님은 내가 이런 상황인 걸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같은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사람들 중 나와 함께 김해에서부터 근무하던 사람들은 다른 부서나 다른 지역으로 모두 발령이 난 상태였고 나머지 인력들은 모두 창원 지역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는 그 들이 모두 나보다 직급이 높아서 표면적으로 내가 일을 해도 팀장에게 보고가 제대로 올라가지 않았다.


지역별 개별 방송국 체제로 운영할 때에는 팀장 이하 팀원들은 직급에 관계없이 모두 수평적 관계로 '담당자' 제도였다. 해당 담당자는 자기 업무에 대해 직접 팀장에게 보고 하고 커뮤니케이션한다. 그러다 보니 왜곡 없는 보고가 되고 업무가 제때 처리가 됐다. 하지만 조직 통폐합 이후 '파트장'을 비롯한 중간 관리자 제도를 도입하면서 '권력'을 갖기 위한 정치가 시작됐고, 중간 관리자의 보고 누락이나 내 사람 챙기기가 완연해졌다. 


한때는 조직문화가 뛰어나다며 중소기업청으로부터 상패도 받았던 우리 회사였는데 바로 옆동네와 통폐합을 하고 나서 점점 조직이 썩어가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조직이 썩아갈수록 구성원의 '평가' 제도는 더 변별력이 없어지도록 만들어졌다. 처음 입사했을 때 나의 목표는 내 업무 내에서 짜였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내 목표는 내 업무와 관계없는 팀원 공통의 목표가 70%를 차지했다. 


내가 15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중소기업을 다녔다. 그 회사들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회사는 단 한 곳도 없을 정도로 세상은 치열하다. 그런 고생 끝에 대기업에 입사를 했고 거의 10년 가까이를 다녔다. 나는 회사에 대한 애사심이 투철했고 아직도 나의 '출신' 회사를 사랑한다.


가끔 옛 상사나 동료들은 '애사심'을 왜곡서 말하곤 했다. 진정으로 회사를 위해 쓴소리를 하면 듣기 싫어하고, 애사심은 단지 부당한 지시를 하더라도 무조건 충성해야 하는 상사에 대한 '충성심'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결코 그건 애사심이 아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이 소중한 회사를 망친다. 나는 아직도 '우리 회사'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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