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단독]대기업 사원의 직장일기(28)
우리 그룹에서는 1년에 한번씩 연말즈음해서 '조직문화진단' 이라는 이름으로 전 그룹의 사원들을 대상으로 익명 설문조사를 시행한다. 조직문화진단이란 그룹의 구성원들이 자기가 소속된 조직(회사, 부서 등)의 만족도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조사하는 것이다. 기업에서 고객만족 설문조사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조사된 결과를 가지고 구성원들이 만족하는 분야가 어디인지 불만족하는 분야가 어디인지등을 살펴보고 구성원들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한 활동들을 차년에 진행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아주 좋은 제도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제도라도 어떻게 운영하는가에 따라 무용지물이 되기도 하고 그 제도가 족쇠가 되기도 한다. 현재 우리에겐 그 제도가 무용지물이자 족쇠다.
조직문화진단의 점수(만족도)는 해당 조직의 조직장의 KPI 항목중에 하나다. 자기 관할의 조직문화진단의 점수가 다른 조직보다 낮게 나올 경우 자신의 고과점수가 까지는 것이다. 해당 조직장은 연말까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조직 구성원들을 위한 배려와 이벤트, 동기부여, 코칭등을 통한 '좋은 문화'를 만들어 가야한다. 물론 업무에 대한 성과를 올려서 목표달성하기도 힘든데 거기다가 구성원들의 '생활'부분까지 모두 만족시키려고 하니 너무 힘든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구성원들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강도를 약하게 '쪼으기'를 한다면 나머지 실무에 대한 목표달성은 멀고도 험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할일 많은 조직장들은 쉬운 방법을 택한다. 그 방법은 바로 '내리사랑' 1년 내내 구성원들의 생활은 나몰라라 하고 오로지 업무 실적, 성과만들 챙기다가 연말 조직문화진단 시즌이 되면 각 팀장들을 소집시킨다. 그리고 팀장들을 협박한다. 조직문화진단 점수가 낮은 팀은 팀장들 고과점수는 잘받을 생각을 하지말라고.. 그러면 팀장은 또 자기팀으로 돌아가서 자기 팀원들에게 똑같이 내리사랑을 전파한다. 이렇게 말단 사원들은 본인들의 유일한 '신문고'인 조직문화진단까지도 억압에 이기지 못해 최고점수 응답을 한다.
익명 설문조사인데 솔직하게 대답한다고 해서 어떤 피해가 오는지 궁금한 사람들도 있을거라 생각한다. 예컨데 우리가 가끔 뉴스나 신문을 보면 대통령이나 정부에서 민간인 사찰이나 카카오톡 감시를 통해 '마음에 안드는' 소식을 전파한사람들을 찾아내서 처벌한다고 하는데 그걸보면 개인의 사생활이 사생활이 아닌 요즘을 느끼게 된다. 하물며 한 국가안에서 개인이 누군지 찾아내서 처벌하는것도 가능한 마당에 고작 기업체에서 기업체의 시스템안에서 기업체의 설문조사를 한 결과가 해당 조직장에게 공유가 되지 않을거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한가지 예로 몇년전 동료한명이 너무 솔직한 응답을 한적이 있다. 우리들끼리는 다들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잘했다며 박수치고 있었는데 인사팀에서 해당 조직장에게 연락을 했다. 당연히 해당 조직관리를 잘해서 직원들 만족도를 높이라고 주문할 줄 알았다. 하지만 피드백된 내용은 '그 조직에 누구누구가 응답을 이렇게 했던데 상당히 부정적인 사원이라 다른 직원들까지 물들수도 있으니 특별관리 하라!'였다. 그 이후로 임금님귀는 당나귀귀를 외치며 우린 모두 '매우 만족' 이라는 응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