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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심 Jun 30. 2024

고객님, 이건 고질병이에요

적응해주세요

중고차를 타다 보니 다른 운전자의 길이 든 차여서 그런지 액셀과 브레이크가 유난히 둔한 것 같았다. 포장된 콘크리트 바닥인데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도 움직이지 않는다든지, 액셀을 거의 끝까지 밟아도 몇 초는 시속 40km로 달린다든지, 하다 못해 속력이 급감한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초보 운전자이기도 하고 중고차는 원래 그런가 보다 하다가 증상이 점점 심해지고 접촉사고까지 겪으니 겁이 나기 시작했다. 더 무서운 사실은 점검 센터를 다니면서 원인을 찾아도 부품에는 어떤 이상도 없다고 했고, 결국 새 주인인 내 운전 방식에 길들 수 있도록 차량 변속기의 딥러닝 체계를 초기화하면서 이 소동을 마무리했다. 가는 센터마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말했다. '고객님, 이건 이 차종에게 일어날 수 있는 고질병이에요. 다른 운전자들도 불편함을 호소하면서 타고 있어요.'


고질병. 이 단어는 생각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몇 년 만에 휴대폰을 새로 구입하고 중요한 동영상을 촬영했는데, 당시 천장에 달려 있던 거대하고 우아한 조명이 영상 속에서는 유령처럼 두 개가 겹친 모습으로 나왔다. 동영상을 못 쓰게 된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카메라를 계속 사용하려면 문제를 해결해야 해서 서비스 센터 방문의 사유로 회사에 시차까지 냈다. 같은 제조사 휴대폰을 십 년 가까이 사용하면서 서비스 센터에 달려올 만큼 심한 증상은 처음이라는 황당함을 담당 엔지니어께 설명했더니 정중한 자세로 이런 말을 돌려주셨다.

'고객님. 이건 이 모델의 고질병이에요. 제가 교품을 해드려서 증상이 나아지면 그렇게 해드리겠지만, 상황은 그대로일 거예요. 다른 사용자들께서는 제조사 측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기다리고 계세요. 정 불편하시면 밝은 빛 아래에서는 카메라 화소를 한 단계 낮춰서 촬영해 보세요.'

백오십만 원이나 주고 산 휴대폰의 하자를 알아서 감수하라는 답변에 화가 나면서도 결론적으로 어쩔 수 없다면 수긍하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 같은 사용자가 또 있다는 말이 떠올라 증상을 검색해 보니 이미 이 제조사 휴대폰의 오랜 증상으로 얼마나 유명한지 '고스트 현상'이라고 불린다. 어쩔 수 없다. 사진의 색감과 단조로운 소프트웨어가 마음에 들어서 선택했기 때문에 휴대폰과 입장을 조율하면서 사용한다. 구입한 지 반년도 더 지난 지금, 카메라와 관련된 업데이트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내 돈으로 내가 산 시행착오들을 겪은 덕분에 괜찮은 대응 자세를 배웠다.

예전에는 누군가 나를 험담할 때 괜히 의기소침해지고 해명할 준비부터 했다면 이제는 조금 다르다.

'말씀하신 문제는 제 고질병으로 보입니다. 적응하고 계시면 점차 개선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를 험담하기 시작한 상대는 대부분 불편함을 표출하는 데에 목적이 있고, 진실이나 내 이유는 들을 마음이 없다. 정중히 '고질병' 발언으로 상대의 의견을 어느정도 존중하면 그릇이 큰 사람은 본인이 한 말을 알아서 돌아보지 않을까 생각한다. 반대의 사람은 원하는 반응을 얻지 못해 약이 오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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