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 속 본모습
탈 수도권 생활이 한 달을 넘어가면 주변을 가득 채웠던 사람, 건물, 불빛, 행사, 괜히 알아야 할 것 같은 정보, 내 것도 아니면서 내 것인 척하던 온갖 기운들 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나는 이 빈틈을 '말씀 많이 들었어요. 무료함이시죠?' 하고 금세 알아본다.
처음에는 신기했다. 자는 시간 외에는 가만히 있어도 아무것도 안 한 기억 없는 모순의 삶을 살아왔는데, 무료하다는 새로운 기분이 들어서 반갑게 맞는다. 하지만 겪어 본 이들은 안다. 무료함은 이름과 달리 활발해서 머릿속에 처음 자리 잡을 때는 가만히 지내는 것 같다가 갑자기 자존심을 툭툭 건드린다. 정신을 점유하려는 전조증상 같은 것이다. 무료함은 지금껏 내가 게으른 본능을 거스르고 정신사나움을 받아들이면서까지 겪은 분주함이 사실은 허구에 거품이었다고 요란하게 주장한다. 나는 이 무료함과 평화롭게 지내다가도 언뜻 그 주장이 맞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늦잠 자던 휴일 이른 아침에 한 번씩 이불을 걷어차면서 일어난다. 그런 날은 할 일의 일주일 분량이 하루에 이뤄진다.
무료함은 가까이 지내도 좋은 감정이지만, 내가 열심히 단련한 내면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적나라하게 알려줘서 무섭기도 하다. 무료함이 시도한 만행들과 패배 과정은 이렇다.
의미 없이 갖고 싶은 물건 생기게 하기
→ 샀다면 주식 투자 손실보다 충격이 컸을 금액이다. 갖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스크랩 목록에 담아서 이미 가진 기분을 내고, 비슷한 금액의 금융상품을 구입해서 충동을 달랬다. 장바구니는 결제 바로 전 단계라서 절대 위험하나, 평소에 충동구매를 하지 않는다면 장바구니에 담아도 괜찮다.
사소한 감정에서 못 빠져나가게 하기
(대표 증상: 상대가 평소보다 조금만 소홀해도 반응하기, 신경 안 쓰이던 상대 말투가 갑자기 서운하게 들리기, 가만히 있다가 난데없는 자괴감에 휘둘리기)
→ 순간 감정이 흐르는 대로 반응하기 전에 용수철처럼 일어나 집안일하기, 계단 오르기, 동네 걷기 등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행동을 했다. 힘 안 들이는 일로는 설거지를 가장 추천한다. 격한 감정이 올라오던 당시 상황을 머릿속에서 비우고 몸을 움직이다 보면 이성이 돌아와 내가 하려던 행동이 얼마나 영양가 없는지 깨닫게 된다. 올라온 감정의 원인이 타인이었다면 이성이 돌아온 다음에 대화한다. 이 과정은 몇 번만 연습해도 터득한다.
식사를 하고도 먹을 것에 손 뻗기
→ 어떤 설명도 필요 없이 이 증상이 가장 위험하고 대가는 참혹하다. 이 행동을 지속하면 남는 것은 불필요한 살과 성인병이다.
아무도 관심 없는 혼자만의 발버둥이 정상을 찍을 즈음 한동안 정신이 드는데, 이때는 손발에 행동 증폭기가 달리는지 무슨 일을 해도 해낸다. 내 경우는 해야 하는 일 말고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통틀어 하고 싶었던 일을 찾아서 무료함이 곧 내가 되기 전에 재미를 붙였다. 흐르는 대로 살아온 일수를 고려하면 평생 적성이 하루이틀에 나올 일은 아니기 때문에 여유 있게 종이를 펴거나 컴퓨터를 켜고 어린이 시절을 포함해 지금까지 받았던 칭찬, 상패, 흥미가 사그라들어서 그만둔 일, 시기가 안 맞아서 못 했던 일, 지금 하고 싶은 일을 떠오를 때마다 적는다. 무료함 다루는 이야기가 위기에서 절정으로 가는 단계에 이런 말이 와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일 목록을 만드는 일이 창작의 영역인 줄 처음 알았다. 뭘 적으려고만 하면 짧은 시간 안에 꿈과 희망이 가득하려다가 고통에 시달리다가 당장 책상 앞을 떠나고 싶어진다. 그러면 자리를 떠나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서 생각을 잇는다.
두 주가 지나자 목록에는 틈틈이 주시할 만한 글이 채워졌고 느낌 오는 일을 찾으면 빠르게 실천했다. 이미 만들어진 목록을 볼 때는 생각보다 몸을 먼저 움직여 해보고 아니면 다른 일로 넘어가는 과정을 반복해야 최종 목표에 닿는 기간이 줄어든다. 가만히 있어도 마음이 분주했던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여기까지 오니 욕심이 발동했다. 하고 싶은 일이 기왕이면 오래가는 방법을 찾다 보니 배운 일로 주변에 영향을 주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지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명리학을 공부해서 커피 값에 고민 들으면서 같이 해결책을 찾는 일, 목소리를 더 연구해서 소소한 성우 활동을 하는 일, 마음과 타협하는 과정을 기록해서 공유하는 일이 모두 이 과정에서 생겨났다. 무료함이 쓸고 간 자리는 공허함과 무기력함만 남지 않을까 하고 초조해했던 스스로가 민망할 만큼 원만한 합의로 마무리됐다. 위험하다고 단정 지었던 감정도 알고 보면 고마운 존재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에 이렇게까지 애쓰지 않아도 몸이 일으켜진다면 부럽고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