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09(D+93)_인도/뭄바이
오랜 친구들과 축구를 많이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에 다른 반 친구들과 하는 게 전부였지만 졸업 후에는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우리처럼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경기를 했다. 한 겨울 쌓인 눈에 공이 푹푹 박힐 때도, 한 여름 내리는 비에 공이 둥둥 떠다닐 때도 축구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없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리고 그렇게 경기를 하러 가기 전이면 항상 마인드 컨트롤을 위해 음악을 들었다. 당시 들었던 노래 중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클릭비가 부른 '백전무패'라는 노래였는데 이 노래를 들으면 경기에서 절대 질 것 같지 않았다. 요즘은 그때만큼 승리를 갈구하며 운동을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끔 꼭 이기고 싶은 경기가 있으면 '백전무패'를 찾아 듣곤 한다.
여행을 할 때도 항상 노래가 따라다녔다. 혼자 다니던 여행이 많았다. 그럴 때면 귓가에 흐르는 음악은 외로운 여행자에게 큰 힘이 되었다. 오래 걸을 때나 장시간 이동할 때, 또 모든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혼자 머물 때 지금처럼 핸드폰만 집어 들면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은 시대가 아니었다. 여행 전에 MD나, MP3에 엄선하여 담아 온 음악을 듣는 정도가 남는 시간에 할 수 있는 최고의 호사였다. 김동률 님의 '출발'이나 오장박트리오의 '내일이 찾아오면'(요즘은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를 한 것 같다.) 같은 노래는 지친 여행자가 다시 걸을 수 있는 힘을 주었고 때때로 신승훈 님의 발라드를 들으며 혼자 감상에 젖곤 했다.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하던 목소리는 서영은 님이었는데 그녀가 부른 '웃는 거야'는 여행을 하며 복잡한 머리를 비우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아우랑가바드에서 뭄바이로 가는 기차는 새벽 3시에 출발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래도 여유 있게 역에 도착하겠다고 1시 50분부터 택시를 잡기 시작했지만 누구도 나의 호출에 응하지 않았다. 기차는 고사하고 역에도 가보지 못하고 표를 날릴 판이었다. 호텔 앞에 택시 한 대가 서 있었는데 기사 아저씨가 의자까지 젖히고 자고 있는 바람에 깨울 수 없었다. 만약 마지막까지 몰렸으면 어떤 결정을 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휑한 밤거리를 헤매던 릭샤 한대를 겨우 잡아 타 비싼 돈을 내고 역까지 갔다. 고난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타야 할 기차 번호는 '17611'이었는데 비슷한 시각에 플랫폼에 표기된 숫자는 '17612'였다. 다른 나라 같으면 당연히 '17611'을 기다리겠지만 인도는 나도 모르는 새 번호가 바뀔 수 있는 나라이니 불안했다. 게다가 말 그대로 한 끗 차이 아닌가. 결국 여기저기 묻기 시작했는데 대답도 천차만별. 같은 기차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7611'이 떠나면 같은 플랫폼으로 '17612'가 들어온다는 이도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대기하던 플랫폼 맞은편에서 우리가 타야 할 '17611'이 '17612'와 거의 동시에 들어왔다. 같이 들어왔으니 망정이지 '17611'이 '17612'가 떠난 다음에 들어왔다면 '17612'를 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엄청난 고민을 했을 것 같다. 힘들게 올라탄 침대칸은 벌써 누가 사용한 듯 구겨진 침구류가 널브러져 있었지만 이 정도야 이제 대수롭지 않았다. 인도에서의 마지막 대중교통에 무사히 탑승했다는 것만으로 초조하던 마음도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겨우 자리를 정돈하고 누워 이어폰을 꽂았다. 여행 초기 베트남에서 한쪽을 잃어버려 반쪽 이어폰이 된 지 오래다. 그래도 인도처럼 이동거리가 긴 곳에서 늘 나의 소중한 벗이 되어주었다. 다만 통신망이 완전치 않은 구간에 들어가면 멀쩡히 나오던 음악이 끊겨버리곤 했다. 예전에는 통신망과 무관하게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떠나기 전 여행지에서 들을 노래들을 다운로드 사이트에서 내려받아 차곡차곡 정리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그것 역시 여행 전의 설렘이었다. 지금은 그런 번거로움이 사라졌고 원한다면 먼 옛날 추억 속의 노래들도 언제든지 찾아 들을 수 있지만 항상 원활한 통신의 흐름이 전제다. 그래도 역 주변은 괜찮다. 음악이 끊기기 전에 빨리 잠들면 된다.
대학 시절 김동률 님이 그랬고 서영은 님이 그랬듯 요즘 새로운 노래를 발표한 어린 남매가 나에게 큰 위로를 주고 있다. 악동뮤지션의 '소문의 낙원'이 그렇다. 이 노래에는 내가 아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도 들어있고 누군가에게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도 들어있다. 짧은 가사에 잘도 담아냈다. 전자는 '떠나야지만 알 수 있는 게 있죠'라는 가사고 후자는 '누군가 비웃으면 더 힘내요'라는 부분이다. '지치고 병든 나그네'라는 부분도 나의 심금을 울리지만 나는 병들지 않았을뿐더러 그렇게까지 나를 대입하면 너무 서글퍼져 그건 그냥 내 얘기가 아니려니 생각하기로 했다. 이 노래가 세상에 나온 시점이 인도의 끝이자 아프리카의 시작 무렵, 우리가 가장 지칠 때라는 것도 내게는 의미심장하다.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앞으로도 만날 확률이 높지 않아 보이지만 응원가를 들려준 그들에게 멀리서나마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그리고 그들이 건넨 이야기처럼 '느리고 오래 걸어가'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