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호두

20260111(D+5)_타이완/가오슝

by 박대희

가오슝의 날씨는 따뜻했다. 서울에 있다가 제주도쯤 내려온 느낌이랄까. 반팔에 바람막이 하나를 걸치고 나섰는데도 한낮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럴 때마다 그늘에서 잠깐씩 쉬어갔는데 그게 그렇게 좋았다. 여행을 시작하고 가장 이동 거리가 짧은 하루였다. 시작부터 매일 같이 달려온 터라 한 번쯤은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다. 특히 내일은 나라가 바뀌는 날이니 이것저것 준비할 것들도 많았다. 그래서 그저 시내버스로 한 시간 내에 있는 장소들만 찾아다녔다.


우리가 묵었던 곳에서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연지담 풍경구라는 곳에 들르게 된다. 거대한 호수 주변에 볼거리를 모아놓았는데 내가 중국어를 잘 몰라서인지 각각에 대한 설명이 친절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규모나 화려한 색감 덕에 호수를 거니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중에 의미를 알고 들여다본 곳이 있다면 용호탑이다. 용과 호랑이의 형상 뒤로 쌍둥이 탑이 각각 하나씩 서 있는 모습인데 보기에도 좋지만 나름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용호탑을 구경하는 순서가 있는데 반드시 용의 머리로 들어가서 호랑이 머리로 나와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만 행운이 깃들고 액운이 떨어져 나간단다. 이런 류의 지시에는 세계 사람들 모두가 잘도 따른다. 이집트에서 스카라베(쇠똥구리) 조각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사람들이 그러했고, 이탈리아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집어던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러했다. 용의 입으로 줄지어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매우 기이했지만(호랑이의 입에서 줄지어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행운을 빌고 액운을 떨치길 바랐을 것이다. 간혹 호랑이 입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를 보면 저 사람은 어쩌려고 저러나 싶다가도 이걸 내가 왜 이렇게 까지 맹신하고 있나 우습기도 하다.


연지담 풍경구에는 용호탑 외에도 소원을 빌 수 있는 시설이 많았다. 모르는 분께 기도할 수는 없어 그나마 아는 관우상에다 대고 열심히 기도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관우가 아니란다. 도교에서 모시는 어떤 신이라나? 그래도 도교니 다행이다. 사실 나는 종교가 없다. 무교라기보다는 다신교에 가깝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의지할 곳이 필요한데 그래서 교회, 성당, 사찰할 것 없이 여행 중 만나는 모든 신성한 곳은 꼭 들른다. 샤머니즘도 빠지지 않고 이렇게 저렇게 하면 복이 온다고 하는 행위도 반드시 따라 한다.


재미있는 건 아들도 오늘은 진지했다는 점이다. 그간 내가 어디서 기도를 하든 말든 아이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아직 어리니 당연할지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태도가 바뀐 걸 보면 아들 역시 이 여행이 그리 만만치 않다고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도에 집중하고 있는 녀석을 보니 괜히 내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기도가 모두 끝나고 아이에게 물었다. 무엇을 빌었냐고. 우리의 무사귀환, 가족들의 안녕이란다.(표현이 저렇지는 않았다. 듣고 보면 내용이 저렇다.) 그러고는 안타깝다는 듯 한 마디를 덧 붙였다.


"야구를 잘하게 해달라고 빌걸."


그 말에 이렇게 얘기해 줬다.


"아빠도 너와 같은 것을 빌었는데, 야구 얘기는 잘 안 했어. 그건 네가 열심히 하면 할 수 있잖아.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만 빌자"


아들 앞에서 폼 잡으려 한 말은 아니다. 그저 인간이 직접 할 수 있는 일까지 빌면, 정작 인간이 할 수 없는 것들을 챙겨야 할 신들이 혹시 놓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다. 갑자기 생각한 건 아니다. 예전부터 그랬다.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제가 직접 하겠다. 제가 할 수 없는 것들만 도와주시라."라고 말이다. 이번 여행도 그렇다. 내가 노력해서 장담할 수 없는 것들, 그러니까 아들이 빌고 내가 빌었던 그것들이 이뤄지도록 이 세상 모든 신이 도와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