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29(D+23)_캄보디아/씨엠립
프놈펜을 출발한 버스는 밤새 달려 씨엠립에 도착했다. 도착한 시각은 5시 반. 아직 해도 뜨기 전이었지만 버스 정류장에는 많은 툭툭 기사님들이 여행객을 잡기 위해 분주했다. 앙코르와트를 보기 위해 씨엠립에 오기 전부터 아침 일찍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대낮에 내리쬐는 태양을 당할 재간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밤 쌓인 피로감을 당할 재간이 없었다. 이번 버스는 2명이 한 칸을 쓰는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었던 지라(물론 혼자 탑승하는 승객을 위한 한 칸 짜리도 있었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2명의 표를 함께 끊었다.) 지난 몇 번의 야간 교통수단 보다 피로감이 더했다. 그래서 더위고 뭐고 일단은 휴식이 필요했고 조금이라도 눈을 부친 후에 움직이기로 했다.
정신을 차리고 호텔 밖으로 나선 건 정오가 조금 못 미쳐서였다. 그리고 곧장 앙코르와트로 향했다. 앙코르와트는 씨엠립에 넓게 퍼져있는 사원들 중 대표 격이고 실은 50개에 달하는 사원들이 사방팔방 늘어서있다. 그래서 입장 방법은 사원마다 티켓을 구매하여 입장하는 것이 아니라 1일권, 3일권, 7일권을 구매하여 해당 날짜 내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방식이다. 우리는 씨엠립에 총 나흘을 머물 예정이었고 3일권을 구매하여 앙코르와트부터 둘러보기 시작했다.
앙코르와트는 엄청난 문화유산이지만 안타깝게도 미디어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었다. 솔방울처럼 생긴 지붕이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모습을 처음 두 눈으로 접했을 때는 '음, 내가 봤던 모습 그대로군' 정도의 느낌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거대한 규모와 정교한 조각들을 목도한 후에야 현장에 있다는 실감을 했던 것 같다. 실제 씨엠립에서 만난 최고의 장소는 '타프롬' 사원이었다. 앙코르와트가 관광객을 위해 매우 정돈된 느낌이라면 타프롬은 야생 그대로에 여전히 파묻혀 있는 듯하다고 하면 이해가 편할까. 사원을 완전히 감싸 안은 거대한 나무줄기들은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타프롬을 구경하는 1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연신 감탄사를 내뱉느라 정신이 없었다.
문제는 타프롬 관람이 끝난 다음부터 시작되었다. 타프롬에서 크메르 문화를 관람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 정점을 찍은 후에는 조금씩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우와' 했던 것들이 너무 흔하게, 너무 자주 눈에 띄었다. 심지어는 툭툭을 타고 이동하는 길가에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여기저기 솟아오른 솔방울 지붕은 어느 시점부터 내가 즐겨 걷던 우리 동네 수원 화성의 기와지붕처럼 느껴졌다. 둘 다 세계 문화유산이니 꿀릴 것 없지 않은가. 하지만 씨엠립까지 와서 자그마치 사흘 이용권을 구매했는데 '나는 이제 그만 보련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별다른 방법이 없던 나는 비슷하게 생긴 사원들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유적지에 관심이 많은 나조차 이럴진대, 아들은 이미 앙코르와트의 후반부부터 조금씩 지루해하기 시작했다. 3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 흥미가 떨어진 아들을, 흥미가 조금 덜 떨어진 아빠가 끌고 다니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 우리가 들른 사원은 자그마치 네 곳. 이 정도면 꿈에도 솔방울 지붕이 나올 판이다. 하지만 우리는 내일 또 솔방울 지붕을 뒤집어쓴 이름도 어려운 사원들을 찾아 나설 것이다. 새로운 사원을 방문할 때마다 우리의 만족도는 조금씩 하락하겠지만 호텔방에만 앉아 있을 수는 없다. 그래도 오늘 내가 보지 못한 무언가가 내일 등장하기를 기대해 본다. 그게 여행이 주는 기분 좋은 기다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