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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박성진 Oct 22. 2021

자부심 vs. 자존감 vs. 자신감

니체와 함께 애자일을 (5화)

“오늘은 안녕하신지요?”
여러분의 오늘 속에 살고 있는 니체입니다.


천국을 위한 3가지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꽃'과 '별'과 그리고 '어린 아이'리라.
Tre cose ci sono rimaste del paradiso: 
i fiori, le stelle e i bambini.


 저는 이 경구를 이렇게 해석해 봅니다. ‘꽃(fiori)’은 일상 속에서의 ‘쾌(快)’와 ‘재미’,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의미하고, ‘별(stelle)’은 긴 삶의 여정에서 장기적이고 궁극적으로 추구해 나가는 삶의 ‘목적’과 ‘의미’, ‘큰 행복’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둘을 조화시키며 삶을 경쾌하고 자유롭게 이끌어가는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bambini)의 마음’이 그 마지막이지요. 이 세 가지가 있다면, 우리가 사는 삶이 아무리 고되고 험난해도 ‘헬(Hell) 조선’이 아닌 ‘헤븐(Heaven) 코리아’를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 과정이 그리 녹록지는 않기에, 이를 위해서는 보통 사람들의 정신력보다는 강한 ‘위버멘쉬’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지만요.

 이런 해석에 비추어 볼 때, 이 격언은 제가 지난 만남에서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했던 삶 속에서의 ‘재미’와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을 과연 누가 했는지가 궁금하여 이를 수소문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Dante)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라고들 하더군요. 사실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제가 단테 선생을 ‘무덤 위에서 시를 짓는 하이에나’라고까지 표현하며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제가 왜 그랬는지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좀 더 이야기를 해드리죠). 헌데 그런 단테 선생과 저의 생각이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니 놀라웠습니다. 



 그러던 찰나에 마침 여러분의 오늘 속에 함께 살고 있는 단테 선생을 우연히도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제가 살아 있던 1800년대 당시의 시절에는 단테 선생이 작고한 지 이미 수백 년이 지난 후였고, 당연히 그 분과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앞 뒤 생각 안하고 그 분의 뒷담화를 했었더랬습니다. 헌데 막상 오늘 날에 그 분과 갑작스레 조우하게 되니 무척이나 당황스럽더군요. 그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진땀이 납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단테 선생께서는 저를 보고 화를 내시지 않고 너그러이 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 생전의 불편한 말 대신에, 위의 경구가 인상 깊었음을 표현하며 겸연쩍게 인사를 건냈습니다. 그러자 단테 선생께서도 저의 저서들을 읽어 보았고 상당히 인상 깊었다고 하시며, 왜 제가 저 경구 이야기를 꺼냈는지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셨습니다. 헌데 놀라운 것은 저 말은 당신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저 경구가 당신의 저서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의 천국(Paradiso)편 5곡의 74~75행에서 따온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지만, 정작 해당 글은 그 내용이 아닐 뿐더러 신곡의 그 어느 부분에도 이 경구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후대에 누군가가 새로 만든 문구이며 이 것이 마치 단테 선생이 한 말인 것처럼 잘못 퍼졌고, 오히려 단테 선생께서는 혹시 내가 당신을 헌담(역시 조금은 마음에 담아두고 계셨더군요! 혹시 신곡을 새로 쓰셨다면 제 이름을 지옥에 쳐박어 넣으시지 않을까 걱정이군요.)한 것이 미안한 마음에 그리 한 것은 아니냐고 되물으셨습니다. 단테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긴 했지만, 어찌 됐건 저는 저 경구가 참으로 좋습니다. 앞서 저의 관점에서 풀이해드린 것처럼 제 생각들과 맞닿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이를 계기로 단테 선생과 화해의 기회를 잡은 것도 행운이었고요. (단테 선생과의 대화는 기회가 되면 나중에 좀 더 말씀을 나눠드리도록 하지요.)


 서두가 길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과거의 저는 ‘쾌’보다는 ‘위버멘쉬’의 삶을 훨씬 강조해왔지만, 여러분의 오늘 속에 사는 저는 이 부분에 있어 그간 생각을 좀 더 다듬은 부분이 있었고 이(‘쾌’와 ‘위버멘쉬’의 균형과 조화)를 지난 만남에서 소개 드렸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위버멘쉬’를 좀 더 강조했을 뿐이지, 과거에도 결코 ‘쾌’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증거를 대볼까요? 저의 작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작은 일에도 최대한 기뻐하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덩달아 기뻐할 정도로 즐겁게 살아라. (중략) 부끄러워하거나 참지 말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싱글벙글 웃어라’, 그리고 ‘한 번도 춤추지 않았던 날은 잃어버린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하나의 큰 웃음도 불러오지 못하는 진리는 모두 가짜라고 불러도 좋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방랑자와 그 그림자>에서도 ‘산을 오른다. 짐승처럼, 망설임도 없이. 땀 범벅이 되어 오직 정상을 목표로 오를 뿐이다. 오르는 동안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질 테지만, 오로지 높은 곳을 향하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한다. (중략) 마음의 여유를 잃고 이해타산적인 행동만을 중시한 나머지 오로지 그 관점에서 인간적인 것조차 모두 쓸모 없는 짓이라 간주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의 인생 자체를 잃게 되는 일이 빈번히 자행되고 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입니다. 쓸 데 없는 기우 일 수도 있지만, ‘쾌’와 ‘위버멘쉬’의 균형과 조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제가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분도 있을 듯 하여 이렇게 길게 부연을 드리며 또 다른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먼저 다음의 그림을 봅시다. 제가 노년에 살고 싶었던 시골집을 그린 것이라 가정해보죠. 이제 이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을 구합니다. 



 글 읽기를 잠시 멈추고, 저에게 건네줄 이 집에 대한 의견을 한 개씩만 생각해 보실까요?

 생각을 마저 떠올리시기 전에 자동적으로 다음 글로 눈을 넘기지 마시고, 잠시 충분한 여유를 갖고 이 집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을 꼭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 충분히 생각해 보셨나요?

 여러분의 의견은 무엇인가요?

 펜이 있다면, 한 번 적어 보실까요? 

 그리고 이제 그 의견을 한 발짝 떨어져서 살펴봅시다.

 혹시 그 의견은 이 집의 긍정적인 부분에 대한 칭찬에 가까운가요? 아니면 개선해야 할 부분에 대한 조언에 가까운가요?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하면 대부분은 칭찬할 점 보다는 개선해야 할 점에 초점을 둡니다. 이는 상대에게 더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될 수도 있고, 보다 원초적으로는 칭찬보다는 개선할 점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보다 능력 있고 우월하게 보일 수 있다는 심리적인 이유에 기반할 수도 있습니다. 어찌 됐건, 이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비단 타인에 대해서 조언을 해줄 때 뿐만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성찰을 할 때도 흔하게 발생합니다. 헌데 문제는 삶에는 관성이 있어서 급격하게 실제의 변화를 만들어 내기는 어렵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잘 알면서도 이를 하루 아침에 쉽게 바꿀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요. 그렇다 보니 이런 방식의 성찰이 일회성이 아니라 너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면, 쉽게 개선되지 않는 ‘현실’과 성찰을 통해 각성하는 ‘이상’ 간의 괴리감이 쉽게 좁혀지지 않고 지속되는 것에 대해 답답해 하게 되죠. 즉 나아지지 않은 자신의 모습에 실망을 하게 되고, 더 심각하게는 이 것이 강화되어 자괴감까지 들 수 있습니다. 


 ‘자괴감’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자부심’, ‘자존감’, ‘자신감’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해 볼까요? 혹시 이 세 단어의 뉘앙스 차이를 설명하실 수 있으실지요?

 이해를 돕기 위해 시간 축을 더해봅시다.



자부심: 과거에 내가 한 일 중, 잘한 일에 초점을 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의도적인 마음과 감정

자존감: 현재의 나의 존재에 대해 느끼는 긍정적인 감정과 느낌

자신감: 미래의 아직 겪지 않은 일에 대해 내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긍정적인 느낌과 감정


 어떤가요? 시간 축을 더하니 세 단어의 차이를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겠죠? 여기에 하나의 개념을 더 추가해 봅시다. 세 단어의 마지막 어미를 보면 어떤 단어는 '-감(感)'으로 끝나고, 또 어떤 단어는 '-심(心)'으로 끝이 납니다. 이 둘 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저는 이렇게 정의를 내려봅니다.


-감(感): 주어진 상황에 대해 감지되는 느낌이나 반응하는 감정 (감 잡았어!)

-심(心): 상황을 대하는 적극적인 의지나 바람에 기반한 능동적인 감정 (결심했어!)


 앞 단어는 똑같고 어미만 다른 ‘자존감’과 ‘자존심’을 이러한 기준에서 살펴볼까요? '자존감'이 내 존재에 대해 느껴지는 반응하는 감정이라면, '자존심'은 타인이 나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기를 바라는 의지이자 바람, 그리고 이에 기반한 기준치가 담긴 능동적인 감정입니다.

 다만 여기에서 하나 주의해야할 점이 있습니다. '능동'과 '반응(수동)'의 단어가 갖는 일반적인 어감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 '능동'이 보다 긍정적으로 해석되고, '반응(수동)'이 이에 비해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허나 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존심'과 '자존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기대하는 기준치를 능동적이고 의도적으로 설정해놓고 그 기준치보다 낮게 대우를 받으면 ‘자존심이 상한다(나의 의지와 바람이 충족되지 못해 속상하다)’라는 표현을 합니다. 한편 자존감은 기준치를 능동적으로 설정해 놓고 외부의 자극이 그 기준해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높고 낮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감지를 통해 나만의 절대적 자존감 정도의 높고 낮음을 가늠합니다. 가장 이상적으로는 내/외부의 자극과 상관없이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스스로의 존재감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다면 정말 멋진 일이겠지요!

 이를 향한 한 가지 제안을 드린다면, 나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자존심의 기준들의 목록을 조금씩 줄여나가는 겁니다. 나의 존재 가치를 높이기 위해 꼭 지켜야할 것과 이와는 반대로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최소한의 기준만을 남겨놓은 채 말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기준을 제외한 내/외부의 자극들로 인해 자존심이 상할 일이 줄어들 것이며 자존감을 높게 유지할 수 있을테니깐요.


 그렇다면 '자부감'과 ‘자부심’은 어떤까요?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해 보면, ‘자부감’이 과거에 수행한 일을 고루 살피어 아쉬운 점보다는 잘한 점이 더 많다고 생각되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드는 긍정적인 느낌과 감정인 반면, '자부심'은 아쉬운 점이 많더라도 이보다는 잘한 점에 의도적으로 초점을 두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 의지이자 바람입니다. 차이가 있지요? 물론 앞서 살핀 ‘자존감’과 ‘자존심’에 비해, ‘자부감’과 ‘자부심’의 구분이 살짝 모호하긴 합니다.

 그럼에도 유사한 상황 속에서 ‘자부감’보다는 ‘자부심’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를 돌아볼 때 우리가 의도적으로 잘했던 점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앞서 집 그림을 가지고 실험했던 것처럼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 상 ‘아쉬웠던 점’, ‘후회되는 점’에 보다 많은 초점을 두게 마련입니다. 이 것이 심하면 ‘자괴감’까지 드는 것이지요. 심지어는 의도적으로 나의 부정적인 면만을 파고 들며 '자괴감'을 넘어 '자괴심(-심!)'을 느끼는 상황에까지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의지를 담아 우리의 잘한 점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레가 오른 편으로 쏠리면, 강하게 왼쪽으로 당겨야 그 균형이 맞춰지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자부감’보다 ‘자부심’이라는 단어를 보다 많이 사용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부심은 나아가, 현재의 내 존재에 대한 자존감을 높이고, 미래의 일에 대해 자신감을 갖는데 큰 밑 바탕이 되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과거의 경험에 대한 자부심에만 취해 있다면 소위 말하는 ‘꼰대’가 되겠지만요!


 오늘은 삶 속에서의 '꽃'과 '별'을 추구하는 '어린 아이'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부심', '자존감', '자신감'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번 만남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하여, 대표적인 메타인지적 활동인 ‘성찰(reflection)’과 ‘회고(retrospective)’ 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죠.


이상, 과거에 살았던 니체가 아닌 여러분들의 오늘 속에 살고 있는 니체였습니다.
늘 그렇듯이 여러분의 행복과 안녕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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