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ge Dec 30. 2019

남은 삶

나는 어제 다시 살아났다. 최소한 집사람 마음속에서는 그랬다. 새벽에 일어나 독서를 하던 내가 어떻게 된 일인지 늦잠을 잤다. 평소대로 서재문을 잠그고 그 옆 방에서 새벽잠이 다시 들었던 것이다.


아들네서 손주들 학교 보내고 아침에 집에 온 집사람이 30분 이상 방문을 두드린 모양이다. 방 안에서 인기척이 없으니 오만가지 상상을 다한 모양이다. 지인들에게 또 관리사무소에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했다 한다.


2년 전 딸아이 시아버지께서 화장실에서 쓰러졌지만 안에서 문이 잠겨 바로 손을 쓸 수 없이 돌아가셨다. 안사돈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마음이 깨어져 버렸다. 이런 일을 가까이서 보았기에 집사람이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희미한 소리에 잠을 깨 나가보니 집사람 얼굴이 말이 아니다. 크게 한소리 듣고 나서 정신 차려보니 미안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30분 동안 남편 없는 세상을 경험하면서 공포를 느꼈으리라. 부부가 함께 살면서 한 사람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다는 것을 상상이나 해보았겠는가? 큰 숨을 내쉬면서 푸념하는 집사람을 달래면서 나 또한 집사람과 거의 같은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아웅다웅하면서 정작 내일 죽을지도 모름을 깨달은 것이다. 볼 수만 있어도, 걸을 수만 있어도, 살아만 있어도 감사한 일이라고 말은 들었지만 이를 실감한 것이다.


노년에 대해 유명한 책을 쓴 미국 철학자 윌 듀런트는 삶에서 확실한 것은 하나뿐인데 바로 죽음이라고 하고 있다. ‘죽음이란 멋 내기와 똑 같이 쓸데없는 잡동사니를 제거하는 과정, 불필요한 것을 잘라내는 과정이다’라고 하였다.


애증, 용서, 싫음, 집착, 탐욕 같은 무겁고 불필요한 것을 버리라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는 대를 이어가는 사랑과 생명의 멋을 내라는 뜻일 것이다.


고마운 사람에게는 고맙다고 말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는 손을 내밀고, 열심히 인생을 달려가는 사람에게는 잠시 쉴 수 있도록 해 주고, 예쁘고 귀여운 이들과는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 일을 하면 될 일이다.


이렇게 보고 느끼는 것이 단순해지면 남은 삶도 가벼워지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베르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