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국수 순례기 — 메밀 한 그릇이 이어온 길

광암막국수와 용둔막국수

by 글곧

막국수를 처음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어쩌면 냉면 때문이었다.

오래전부터 평양냉면을 좋아했다. 거의 맹물처럼 투명하고 심심한 육수, 약간 질긴 듯 탄력 있는 면발, 그 절제된 맛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그러다 종로 4가 인의동 시계골목 안쪽에 있는 함흥냉면집을 알게 되었다. 함흥냉면은 달랐다. 2/3는 비빔으로 먹고 나머지에 육수를 부어 붉은 물냉면으로 마무리하는 방식이 몸에 붙었다. 양념이 배어 뻘겋게 물든 국물을 들이켜고 나면 이상하게 허기가 가셨다. 그 기억이 어느 날 막국수 쪽으로 손을 이끌었다. 매콤한 양념, 메밀 면발, 붉은 국물 — 어딘가 맥이 닿아 있었다.


막국수의 어원을 두고 여러 이야기가 있다. 국수를 막 만들어 냈다는 것, 혹은 메밀껍질과 속알맹이를 막 섞어서 만든 국수라는 해석 모두 이 음식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냉면도 따지고 보면 차갑게 말아먹는 국수라는 점에서 막국수와 다를 바 없다. 다만 냉면이 주로 고구마 등의 전분을 갖고 만든 평양 지방의 상차림에 속한 음식이다. 이에 비해 막국수는 당초 강원도 화전민이 먹기 시작했다고도 하는데 고구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값이 싼 메밀로 만든다. 메밀을 갈아 반죽하고, 국수틀에 눌러 뽑아, 간단한 양념으로 내면 그것이 전부였다. 부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만들 수 있었다.

그 소박함이 막국수를 지역마다, 집집마다 다른 음식으로 만들었다. 서울에서 먹는 막국수와 강원도에서 먹는 막국수가 다르고, 같은 마을 안에서도 두 집의 맛이 전혀 다르다. 그래서 막국수에 관한 한, 어느 집이 최고라는 말은 거의 의미가 없다. 전국의 막국수집은 저마다 최고이기 때문이다.


처음 막국수의 맛을 알게 된 것은 수유리 시장 안에 있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오래된 집이었다. 깨를 범벅처럼 넣고 다진 양념을 듬뿍 풀어 붉게 물든 국물에 말아 내왔는데, 참기름이 너무 많아 기름이 둥실 떴다. 세련된 맛은 아니었다. 그런데 자꾸 생각이 났다. 꽤 멀었는데도 다시 찾아갔다.

그러다 어느 날 포천에서 길을 가다 허름한 막국수집으로 들어섰다. 할머니가 메밀을 직접 반죽하고 국수를 뽑아 내왔는데, 양념이라고는 간장 반 숟가락이 전부였다.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는 순간 한 젓가락 들었는데 — 맛이 있었다. 놀랍도록. 메밀 자체의 향, 면발의 결, 그 간장 반 숟가락이 만들어내는 균형이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막국수는 양념이 아니라 메밀이 하는 음식이다. 그리고 그 메밀의 가능성은 집마다 다르게 열린다는 것을.

그 이후로 지방을 다니다 허름한 막국수집이 보이면 무조건 들어갔다.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투박할수록, 양념이 단출할수록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20여 년 전 매제의 권유로 강원 참숯가마를 처음 찾았을 때의 일이다.

당시 참숯가마는 지금처럼 관광지가 아니었다. 숯을 꺼낸 가마는 하루가 지나도 뜨거운 열기가 남아 있었고, 그 열기가 이틀가량 지속되는 동안 동네 사람들이 들어가 원적외선 사우나를 즐겼다. 입장료도 없었다. 삼겹살을 사 들고 가면 숯 뜨는 넓은 삽에 고기를 올려 벌겋게 달아오른 숯구덩이에 잠깐 집어넣었다 꺼내면 그대로 구워졌다. 몇 초면 충분했다. 그렇게 구워진 삼겹살을 인부들과 함께 나눠 먹었다. 돈도, 테이블도, 메뉴판도 없었다. 지금처럼 입장료를 받고 바비큐장까지 갖춘 시설이 된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땀을 빼고 나와 준비해 간 속옷으로 갈아입고 귀로에 올랐다. 시골길 삼거리에서 막국수집 두 개가 마주 보고 있었다. 광암막국수와 용둔막국수였다. 당연히 둘 다 들어가 봤다.

숯가마에서 흠뻑 땀을 흘리고 먹는 막국수로는 이보다 나을 수 없었다. 다만 결이 달랐다. 광암막국수는 메밀 함량이 조금 더 높아 면이 부드럽고, 수육이 좋다. 입에서 살살 녹는 그 수육을 막국수 한 젓가락 사이에 끼워 먹으면 한 끼가 완성된다. 용둔막국수는 국물이 좀 더 진하고, 메밀김치전이 일품이다. 종잇장처럼 얇게 부쳐내는 그전 한 장을 뜯어먹으면 메밀 특유의 거친 향과 김치의 신맛이 섞이면서 묘하게 어울린다.

찾아가는 길은 단순하다. 영동고속도로 횡성 둔내 IC에서 나와 좌회전, 3킬로미터 직진 후 우회전, 다시 3킬로미터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두 집이 거기 있다.

지금은 분당동치미 막국수집에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찾는다. 시원한 동치미 국물에 식초 한 바퀴 들러 먹는다.


막국수를 오래 먹어오면서 하나를 알게 되었다. 이 음식은 완성된 것을 먹는 것이 아니라, 먹는 사람이 완성시키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식초를 얼마나 넣을지, 겨자를 칠지 말지, 국물을 먼저 마실지 마지막에 부을지 — 그 모든 선택이 결국 자기만의 막국수를 만든다. 그래서 막국수집은 저마다 최고일 수 있고, 먹는 사람마다 최고의 집이 다를 수 있다.

당신 근처의 막국수집은 어디인가. 그 집만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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