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작가 @Yontada)
시금치에 정나미가 떨어진 건 정확히 20년 전부터다.
만나는 사람마다 사진 찍게 시금치를 먹어보라는 둥
시금치를 던지며 거짓말 좀 그만하라는 둥
점점 지쳐가고 있던 때에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휠체어에 앉은 꼬맹이가 시금치를 먹었는데도 걸을 수 없다고
내 앞에서 펑펑 울음을 쏟았던 일이다.
어쩌겠는가.
파이프 담배를 한 모금 빨며 망연히 서 있을 수밖에.
그 일이 있은 뒤론 시금치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핑 돈다.
그래도 이렇게 호텔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노을을 볼 수 있는 여유는
시금치 통조림에 내 얼굴 인쇄를 허락한 것과
가끔 광고에 나가 억지로 시금치를 씹어먹고 소리 몇 번 지르며
화를 내주기 때문일 테다.
시금치처럼 지긋지긋한 유명세 때문에 힘들었던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던 건
곁에서 든든하게 붙잡아 준 블루토의 도움이 컸다.
올리브를 사이에 두고 주구장창 치고받기만 하던 블루토지만
얻어터진 얼굴을 치료하던 간호사에게 한눈에 반해버려
회복 후에도 무작정 찾아가
여기저기 치료해달라고 애걸복걸하다
결국 인생을 치료받고 올리브를 완전히 잊었다.
그 뒤로 블루토는 성격이 순한 곰처럼 변했고
어째선지 나와 얘기가 가장 잘 통하는 술친구가 돼 버렸다.
어느 날 블루토에게 맥주를 마시며
시금치에 대한 트라우마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블루토 자신은
거리에 나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째려보고 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공황장애가 있던 경험을 얘기하며
결국 그렇게 만든 모든 상황이 나쁜 것이다.
뽀빠이 넌 아무 잘못이 없어.
라며 얘기를 해주는데, 그게 그렇게 힘이 될 수가 없었다.
반면 와이프 올리브는 어째선지 날이 갈수록 잔소리만 날이 선다.
이제는 딸까지 가세해 나를 바보처럼 놀린다.
팔뚝에 큼지막한 앵커 문신이 무색하게
나는 놀림에 맞받아치지 않는다.
올리브와 딸이 깔깔 웃으며 나를 놀리는 것이
그 옛날 무엇이든 화만 나던 때와는 다르게
신기하게도 오히려 즐거워진다.
저기 산책을 마치고 올리브와 딸이 걸어온다.
뭐가 그리 신난 지 크게 웃으며 얘기를 재잘 나눈다.
그래 그깟 머리가 핑 돌든 구역질이 나든 무슨 상관이랴.
저 둘을 위해서라면
시금치 통조림 판매 방송에 나가서
한 통이든 두 통이든 꿀꺽 삼키고 고래 소리를 지르며
창피도 모르고 팔뚝 알통을 불쑥할 수 있을 테다.
식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일어나
둘에게 가봐야겠다.
내게 오라고 흔드는 올리브의 그림자 손짓이 길다.
#은퇴한뽀빠이를호텔테라스에서인터뷰중가버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