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by 김대호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특이한 이름의 티켓이었다
"과거의 나와 맥주 한 잔 할 수 있는 티켓"

판에 박힌 이야기처럼
길에서 헤매는 어느 노신사를 도와드리니
그분의 재킷 안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나온 티켓이다.

사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화장실에 앉아 티켓을 쥐고,
돌아가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간절히 생각만 하면 된다.

왜 꼭 화장실이냐 물으니
자신에게 솔직해져야만 티켓이 효력을 발휘하며,
화장실이 그 장소로 가장 알맞은 장소라는 것이다.

반 정도 이해한 채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화장실에 앉아 티켓을 손에 쥐고
곰곰이 과거의 내 모습들을 반추해 보았다.

기억의 지평선 끝자락
마당에서 흙과 돌멩이로 놀이를 하는 아이부터
얼마 전 멀리 이사를 준비하던 모습까지.

그러다 마음이 한 시절로 정해졌고
그때의 내 모습을 생각하며 티켓을 꼭 쥐었다.

꼭 감았던 눈을 떠보니
맑은 바람에 석양이 지고 있는 바닷가 탁자.
푸른 탁자보 위엔 내가 애정 하는 S 맥주와 감자튀김.
그리고 맞은편엔 짧은 머리에 붉은 티가 얼굴에 남은
21살의 내가 눈을 껌벅이며 어리둥절 앉아 있었다.

그랬다.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고
순수하지만 열정이 있어 작고 파란 불꽃같은
21살의 나와 한잔하며 해주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마음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포장하는 법도 중요해!
너무 매달리지 마 있던 마음도 떠나!
적당히 하고 나가서 하고 싶은걸 해!
너무 후회하지도 말고, 너무 걱정하지도 마!

꽤 긴 시간 동안 천천히 얻은 주름처럼
터득한 나름의 방향들이었다.

무엇부터 얘기해줄까 고민하며
맥주를 따라주고, 내 잔도 채웠다.

우선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냐고 물어보자
어느 노신사가 불쑥 찾아와
나를 꼭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번쯤 봐도 좋은 사람일 거라고 했단다.

그 노신사, 꽤 노력하는군.

술잔을 건배하며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도 물었다.

21살의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흐릿한 기억을
자신의 근황으로 정밀하게 되새겨 주었다.

마주 앉아 천천히 그리고 정연히 말을 잇는 나는
내 기억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무모하고 투박하다 생각했던 사랑의 기억은
들어보니
순수한 열정에서 솟아난 부끄럼 많은 용기였다.

여러 경험을 포기했다 느낀 노력들은
들어보니
정해진 위치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의 달음박질이었다.

많은 밤들을 뒤척이게 만든 걱정과 후회들은
들어보니
마땅히 그 당시 현재를 빛나게 만들 사포질이었다.

가만히 듣다 보니 갑자기 어떤 깨달음이 스친다.
그러자 이 말밖에 딱히 해 줄 수 없게 된다.

그래. 너 잘하고 있네, 그렇게 하면 돼.

그랬다.

21살 짧은 머리에 붉은빛이 도는 얼굴의 나는
내가 애초에 생각한 모습보다 더 빛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난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채
청량한 바닷바람을 배경 삼아
그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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