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도 높은 사랑을 보다

고속터미널 어느 커플 목격담

by 김대호



예전 계절이 불명확한 주말 오후
나는 강남 고속 터미널 어느 벤치에 앉아
손에 든 책은 안 보고
정면의 어떤 영화적 장면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내 시선이 다다른 곳에선
이제 막 20대에 접어든 것으로 보이는 커플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벤치에 앉아 있었다.

여자 어깨에 묻은 남자의 앳된 얼굴은
눈물범벅에 눈 주위가 벌게져 있었다.
그런 남자를 단발의 여자가 꼭 끌어안고 토닥여 주고 있었다.

목소리가 들리진 않지만
괜찮아. 괜찮아.라고 속삭이는 모습이었다.

장소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둘 중 한 명은 멀지 않은 미래에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가야 하나보다.

반대편 벤치에서 이 둘을 바라보며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는
내가 과연 누군가와 떨어지기 싫어
눈 주위가 벌게질 때까지 눈물을 흘리는
격한 감정을 느껴본 게 언제였는가 하는 물음이었으며,
물음에 대한 답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아
참담했다.

두 번째로
질량이 있는 모든 물체는 서로 끌어당긴다고 과학자들은 말하던데,
저 둘 사이에는 무엇이 있기에
이 순간만큼은 서로를 떨어뜨리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느낄 수 있느냔 말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의 존재를
내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984년에
Sternberg와 Grajek 이란 심리학자가
열 가지 현상으로 인수 분해하여 미리 설명한 한 것을
작년 심리학 수업시간에 발견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증진시키기를 바라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느끼는 것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높은 존중심을 갖는 것
필요할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의지할 수 있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서로를 이해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 및 자신의 소유물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정서적 지원을 받는 것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서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친밀한 의사소통을 하는 것
자신의 삶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것

이 열 가지를 곱하면 벤치 커플의 사이에 있던
강력한 힘의 이름을 유추할 수 있는데,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순도 높은 사랑’이었다.

그러니 내가 활자로 사랑을 구구절절이 설명하는 책 보다
이 보기 드문 현상에 넋이 나간 것은
자명한 현상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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