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반도 여행기
고흥반도 여행중에 ‘도화헌’에 들렀다.
폐교를 전시할 수 있는 미술관으로 재창조 했다는 이 곳.
네비게이션이 아니었다면 모른 채 지나쳤을 외관이다.
잡풀이 듬성한 폐교 건물 입구에
진행중인 프로젝트 이름이 현수막으로 걸려있고,
책 읽는 소녀상은 넘어가지 않는 페이지를 여전히 정독 중이다.
밤 열두시 종이 치면 책 읽는 소녀는 한 페이지 책장을 넘기고,
책을 다 읽으면 학교에 큰 일이 벌어진다는 어린시절 괴담이 떠오른다.
계단을 오르니 검은 문지기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다.
혓바닥과 치아를 보니 나이가 지긋한 노견이다.
꼬리가 느린 노견은 내 신발과 정강이를 축축한 코로 탐색하고는,
이내 적개심이 없다고 판단한건지, 혹은 관심이 사라진건지
문지기의 자리로 돌아가 가을 빛 쬐며 잠을 청한다.
문지기 노견 외에는 인기척이 없는 미술관
문은 열려 있지만 불은 꺼져 있어 캄캄하다.
입구 옆 전등 스위치를 올리자 주광색 불이 켜지며 나타나는 작품들.
왠지 몰래 들어온 도둑 관람같아 심장이 벌렁하다.
곳곳에 새로운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배송된 작품들을 정리한 흔적이 있다.
미술관 곳곳에 놓인 글귀와 전시 팸플릿을 통해
분명 어젯밤 작품들을 정리하셨을 미술관장님을 추론해 봤다.
과거에 출세한 화가였다가,
지역문화 발전과 소신이 담긴 뜻을 위해 이 고흥반도 끝에 폐교를 미술관으로 바꾸고,
전국 곳곳 뜻 맞는 화가들과 신인들의 작품을 기획 전시하고,
애주가에 열띤 토론과 악기 연주를 좋아하고,
가끔은 숙취에 절어 미술관 앞 나무 옆 의자에 앉아
문지기 노견의 등을 문지르며 남해 바람을 맡는 분.
그 분은 어디 가신걸까.
“문지기 노견에게 안부를 부탁하고 갑니다.”
그냥 돌아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싶어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꿈 속을 헤매던 노견은 내 부탁을 잘 들어주었을까.
충직한 문지기에게 엄한 부탁을 하곤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