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로운 ‘본다’ 그리고 ‘기억한다’
일요일 오후, 카페에서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읽었다.
한 남자가 아내가 초대한 맹인과 집에서 저녁시간을 보낸다.
달갑지 않은 처음 감정이 몇 잔의 스카치와 담백한 대화, 마리화나를 통해 묽어진다.
아내가 침실로 올라간 후, 남자와 맹인은 유럽의 대성당을 소개하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고 듣는다.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 느낌을 아느냐는 남자의 질문에 맹인은 잘 모른다고 대답을 한다.
대성당이 무엇인지 맹인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남자는 나름의 노력으로 대성당을 설명하지만 어린아이 같은 말만 늘어놓는다.
이후 맹인이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바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성당을 설명해달라고.
낯설고 적절한 용기가 필요한 방법을 통해 남자는 맹인에게 대성당을 알려주고,
결국 남자는 ‘진짜’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깨닫게 된다.
시각의 영역을 벗어난 자유로움을 느끼는 남자와 맹인을 잠에서 깬 아내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1996년, 아니면 97년 즈음 영어 과외를 받은 적이 있다.
영어 선생님의 가정집에서 다섯 명의 아이들이 수업을 받는 방식이었다.
한 가지 다른 영어 수업과 다른 점이라면 선생님이 맹인이라는 점이다.
덥수룩한 머리에 진갈색의 그라데이션 선글라스를 쓴 선생님은 초등학교 뒤편의 맹인학교 영어 선생님으로 일하시던 분이었다.
첫 수업 때 선생님은 미국에서 어릴 적 사고를 당해 시력을 잃었다고 알려주셨다.
어렸던 우리는 정말 앞이 안 보이는지 궁금해 선생님의 선글라스 앞을 손으로 가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그런 행동은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다.
선생님과 우리는 거실에 펼쳐진 책상 주위에 앉아 오로지 입과 귀로만 영어를 가르치고 배웠다.
수업은 그 당시에도 낡아 보였던 카세트 플레이어로 영어 동화를 따라 하고,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진행됐다.
영어를 처음 배우는 초등학교 아이들이었으니 수업 진도가 매우 느렸고,
펭귄들이 주인공인 신데렐라 이야기를 거의 일 년 가까이 듣고 따라 말하기를 반복했다.
지하실 입구 바닥 문에 끼어 있던 신데렐라 ‘펭귄’의 귀여운 발 모습 설명이 인상 깊었던 기억이 난다.
펭귄 신데렐라의 앙증맞은 발에 대한 기억과 함께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중후한 외모와 목소리, 때로는 단호했던 태도로 남아있다.
그럼 그분은 우리를 어떻게 기억하실까.
어리숙하지만 영어를 천천히 따라 하는 다섯 아이들의 목소리.
학교에서 일어나는 여러 이야기를 서로 조잘대는 대화 내용.
자신과 함께하는 평범하진 않은 영어수업을 따라오는 태도와 함께
우리의 허락 하에 만져보신 아이들의 얼굴 굴곡이 어우러진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단편 소설 속 남자와 맹인이 새로운 방법으로 ‘보았던’ 대성당의 모습처럼
그분의 기억법이 만든 수업 장면은 꽤나 세밀하고 조화로운 모습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