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의 보이지 않는 비용
가끔 한국 회사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을 찾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일이 없어도 바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가?”를 보면 됩니다. 웃기면서도 씁쓸한 건 그 능력이 실제로 꽤 고난도이기 때문이에요.
1) ‘일이 없는데 잘리기 싫어서’가 만드는 경제학
조직은 원래 불확실성을 싫어합니다. 특히 한국 기업은 실패의 비용이 개인에게 과하게 전가되는 경우가 많죠. 그러다 보니 직원은 이렇게 계산합니다.
“성과를 내서 칭찬받는 확률”보다 “성과를 내다가 삐끗해서 찍힐 확률”이 더 무섭다.
이때 가장 합리적인 전략은 안전한 생존입니다. 그래서 ‘성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을 늘립니다. 회의가 늘고 보고서가 늘고 결재선이 늘고 “정리 한 번만 더”가 늘어요. 정리가 목적이 되는 순간 조직은 멈춥니다.
2) 더 위험한 건 “잘했던 사람이 더 잘한다”는 점
핵심이 여기 있습니다.
일을 잘했던 사람은 “일이 잘 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도 빠르게 습득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알고 있거든요.
상사가 무엇을 ‘좋아 보인다’고 느끼는지
어떤 표현이 ‘성실해 보이는지’
어떤 지표가 ‘무조건 안전한지’
어떤 문서가 ‘반박 불가능한지’
그들은 업무의 본질뿐 아니라 조직의 심리까지 이해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혁신을 만들고 떠나고 어떤 사람은 혁신을 흉내 내는 법을 완성하며 오래 남습니다. 이때부터 회사는 ‘능력 있는 사람’이 남아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능력의 방향이 틀어진 상태가 됩니다.
3) ‘가짜 노동’은 시스템의 산물
이 현상은 개인 윤리로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미 여러 연구와 담론에서 무의미한 업무(가짜 노동)가 조직 설계의 결과로 반복된다고 이야기하죠. ([슬로우뉴스][1])
또 하나의 키워드는 프리젠티즘(presenteeism)입니다.
아파도 출근하고 존재감을 과시하고 “나는 여기 있다”를 증명하는 문화. 생산성을 올리기보다 성과를 깎을 수 있다는 논의가 꾸준히 있어요. ([KCI][2])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조직이 ‘존재’를 평가할 때 사람은 존재를 증명하는 데 시간을 씁니다.
4) 한국이 혁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평가 단위’
혁신은 “평가 단위”에서 시작합니다.
만약 회사가 여전히 이런 질문으로 움직인다면요.
“얼마나 열심히 했어?”
“얼마나 늦게까지 했어?”
“보고는 몇 장이야?”
“회의는 몇 번 했어?”
그 회사는 연출을 강화하게 됩니다. 반대로 질문이 이렇게 바뀌면요.
“이 일의 고객은 누구야?”
“이번 주에 줄인 시간은 얼마야?”
“반복업무를 자동화했어?”
“의사결정이 빨라졌어?”
그 순간부터 ‘일하는 척’은 비용이 되고 ‘진짜 일’이 이익이 됩니다.
5) 그럼 희망은 있나?
희망이 있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가짜 노동은 ‘드러나는 순간’ 힘을 잃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AI가 요약하고 자동화하고 기록하고 비교해버리는 시대입니다. “열심히 한 흔적”이 아니라 “가치를 만든 흔적”이 훨씬 쉽게 보이는 시대죠.
제가 현실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건 거창한 혁신이 아닙니다. (혁신을 ‘선언’으로 시작하면 또 문서만 늘어납니다.) 대신 3가지만 바꿔도 조직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회의를 ‘아이디어’가 아니라 ‘의사결정’으로 정의하기
보고서를 ‘정성’이 아니라 ‘재사용 가능한 자산’으로 만들기
성과지표에 ‘시간 절감/자동화/반복 제거’를 넣기
이 세 가지는 누가 더 똑똑하냐의 싸움이 아니라 조직이 무엇을 존중하느냐의 싸움입니다.
저는 한국이 혁신을 못 하는 나라라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혁신을 ‘개인이 몰래’ 하고 있는 나라에 가깝다고 봐요. 문제는 그 혁신이 조직의 보상체계에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혁신을 숨기고 티 나지 않게 일하고 안전한 비효율을 택합니다.
바뀌어야 하는 건 조직의 평가 언어입니다. 평가 언어가 바뀌면 ‘일하는 척’은 촌스러워지고 ‘진짜 일’이 멋있어집니다. 저는 그 멋의 기준을 데이터로 증명해보고 싶습니다.
[1]: https://slownews.kr/100103
"가짜 노동, 텅 빈 노동"
[2]: https://www.kci.go.kr/kciportal/landing/article.kci?arti_id=ART002932639
"기업규모에 따른 프리젠티즘에 대한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