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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Mar 26. 2022

연탄불로 지은 밥맛의 추억

[시골 소년의 난생처음 상경기]

 옛날 시골 아이들의 소원


옛날에 우리 마을 아이들은 대부분 두 가지 공통된 꿈이나 소원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즉, 그 첫째는 서울 구경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단 한 번이라도 기차를 타보고 싶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건 비단 우리 마을의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전국 어디에서나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대부분 그랬던 것 같다. 나 역시 전형적인 시골에서 태어났기에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나마 운이 좋았던지 두 가지 소원 중 한 가지 소원은 쉽게 이룰 수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수색(더 정확히 말하자면 상암동)을 자주 가게 되었기 때문에 기차는 일찍 타보게 되었던 것이다.


해마다 명절 때가 되면 수색에 살고 있는 집안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리러 가곤 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안(친척)은 오래전부터 대대로 수색(상암동)에 집성촌을 이룬 채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우리 집만 시골에 따로 떨어져 살게 되었는지 난 지금도 그 연유를 잘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그 당시 상암동은 말만 서울특별시였지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어서 내가 살고 있는 시골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오래전에는 서대문구 상암동이었지만 언젠가부터 마포구로 편입된 곳이며 2002년도 월드컵 덕분에 더욱 유명해진 곳이었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상암동은 단 한 가지 서울다운 특별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전깃불이 들어온다는 사실이었다.      


그때만 해도 내가 살고 있는 시골에서는 밤이면 아직도 어둠침침한 등잔불을 켜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상암동이란 곳에 가면 전깃불(백열등)이 들어와서 밤에도 대낮처럼 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번 상암동에 갔다가 시골로 돌아오면 친구들 앞에서 한바탕 전깃불 자랑을 늘어놓으며 으스대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나에게도 마침내 진짜 서울 구경(4대 문안)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아마 그때가 1950년대 중반 중학교 1학년이나 2학년 겨울방학 때가 아닌가 기억하고 있다. 그때 어떻게 해서 겁도 없이 혼자 서울을 가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부모님에게 하도 끈질기게 졸랐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가보기로 마음먹은 곳은 종로구 사직동이었다. 상암동에 살고 있던 8촌 형님댁이 오래전에 사직동으로 이사를 했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기차를 이용해야 했다. 그 당시 경의선 열차는 문산에서 서울역까지 하루에 고작 세 번 운행하고 있었다.   

   

기차는 연신 시커먼 석탄 연기를 내뿜으며 ’칙칙푹푹‘ 하는 소리와 함께 이따금 요란한 기적소리를 내며 달리는 증기기관차였다.      


기차 정거장도 먼 편이었다. 산을 넘고 논두렁길과 밭을 지나 시오리 길을 걸어 나가야만 했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서울역까지 가려면 약 1시간 10분 정도가 소요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난 그때 달랑 8촌 형님댁 주소와 번지가 적힌 메모지 한 장을 손에 들고 길을 나섰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1시간 넘게 달려 드디어 말만 들은 서울역에 무사히 도착하게 되었다.    

 

난생처음 보게 된 서울역 건물은 너무나 웅장하면서도 멋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애국가를 부를 때 가사에 나오는 그 정겨워 보이는 남산도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서 바라보여서 더욱 감격스럽기 그지없었다.  

    

연신 ’땡땡땡땡‘ 소리를 내며 자주 오가는 난생처음 보는 전차들, 그리고 서울 시가지를 붕붕거리며 달리는 시내버스와 말끔한 차림의 서울 시민들, 눈에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이 그저 신기하기만 하여 촌뜨기 소년으로서는 눈이 휘둥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서울역에서 사직동까지 가려면 버스도 있고 전차도 있었다. 하지만 용돈을 아끼기 위해 지나다니는 행인들에게 묻고 또 물어가며 걸어서 사직동까지 찾아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느새 서울역에서 서대문을 거쳐 독립문에 다다르자 이번에는 전차가 다니는 큰 대로 중앙에 독립문이 우뚝 서 있는 광경이 내 눈에 들어오면서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도시개발로 인해 현재는 독립문이 대로변으로 옮겨져 있지만, 그때는 대로 한가운데에 위용을 과시하듯 우뚝 서 있었다.      


교과서에서 조그만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독립문. 그 독립문을 실제로 보게 되니 왠지 가슴이 설레고 감격스러운 마음에 한동안 신기한 듯 서서 바라보고 또 바라보곤 하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독립문에서 무악재 방향을 바라볼 때 대로 왼쪽은 현저동, 그리고 오른쪽은 무악동이 위치하고 있는데 사직동을 가려면 오른쪽에 위치한 무악동을 거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낮은 고개를 넘어가야 했다.


그 고개를 넘어가면 바로 사직동이 나오게 되는데 주소를 묻고 또 물어가며 마침내 용케도 형님댁을 찾아갈 수 있었다.      


연탄불로 지은 밥     


주소를 보고 묻고 또 물어가며 마침내 어느 집 대문 앞에 걸린 문패를 보니 8촌 형님 집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집은 안채와 바깥채로 된 제법 큰 기와집이었다. 요즘에는 아무것도 아닌 보잘것없는 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만 해도 시골에서 조그만 초가집들만 보면서 자란 나는 제법 으리으리하면서도 그렇게 멋이 있을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안에 누구 계세요?“     


나는 대문을 흔들며 몇 번 소리치자 조금 뒤에 인기척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나와서 대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8촌 누님이었다. 누님은 나를 보자 뜻밖이라는 듯 반색을 하며 맞이해 주었다. 누님의 나이는 나보다 대여섯 살이나 연상이었다.     

  

”어머나! 웬일이니? 미리 연락도 없이 어떻게 혼자 여길 찾아왔어?“      


누님은 반색을 하며 나를 방안으로 끌고 들어가더니 우선 요가 깔린 따뜻한 아랫목에 앉으라고 권했다. 그리고는 오느라고 시장할 테니 밥부터 지어줄 테니 잠깐만 기다려 달라며 급히 부엌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밥을 해주겠다며 부엌으로 나갔던 누님이 조금 뒤에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밥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나에게 이런저런 것을 물으며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배가 고프던 나는 방에 태연히 앉아서 이야기만 나누고 있는 누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염치없이 배고 고프니 얼른 밥부터 해달라고 조를 수도 없는 일이어서 은근히 속만 태우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살고 있는 시골에서는 밥을 지으려면 볏짚이랑 곡식 짚, 그리고 나무 등을 아궁이에 꼭 붙어 앉아서 연신 불을 때워야만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물이 없으면 머리에 동이를 이고 공동 우물가로 가서 물도 길어와야 하고 반찬 준비를 하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해야만 했다.    

  

그런데 밥을 해준다던 누님이 방에만 가만히 앉아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만 나누고 있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잠시 뒤,      


’아참! 이제 밥이 다 됐겠구나.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응?”       


누님은 곧 다시 부엌으로 나가더니 어느새 잘 차린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난 두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누님은 밥을 짓지 않고 방에만 앉아 있었는데 그새 밥이 다 됐다니?


그럼 그동안 누가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고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너무 궁금한 나머지 내가 휘둥그렇게 된 눈으로 누님에게 묻게 되었다.   

   

“아니 어떻게 불도 때지 않고 벌써 밥이 된 거죠?”     


그러자 누님이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요즘 서울에서는 나무로 불을 때지 않고 어느 집이나 연탄불로 밥을 짓는다는 것이었다.      


누님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속으로 ‘아하! 서울에서는 연탄불로 밥을 짓는구나! 그래서 서울이 좋다고들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마음속으로 은근히 서울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역시 시골뜨기는 할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연탄불을 사용하기 시작한 역사는 50년대 중반부터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 역시 50년대 중반에 누구보다도 먼저 처음으로 연틴불로 지은 밥을 먹어보게 되었던 것이다.       


난생처음 연탄불로 지어준 하얀 쌀밥의 맛은 꿀맛보다 더 맛이 있었다. 그것이 벌써 60여 년도 훨씬 지난 옛날의 아련한 추억이 되고 말았다.      


연탄으로 지은 꿀맛 같기만 했던 하얀 쌀밥의 추억을 나는 아직도 쉽게 잊지 못하고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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