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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May 18. 2022

옛날의 화장실

[비위가 약한 분은 절대로 읽지 마세요!!]

✱ 비위가 약한 분은 절대로 읽지 말고 그냥 넘어가세요!!


요즈음은 인간의 배설물인 소변과 대변을 처리하기 위한 시설물을 조금 고상한 용어로 누구나 화장실(化粧室)이란 말이 통용되고 있다. 조금 고상하다고 표현한 것은 화장실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왠지 그렇게 느끼게 되었다.      


화장실이란 말은 원래 용변을 끝낸 다음 손도 씻고 세수도 하며 간단히 화장도 고치는 방(室)이란 뜻이다.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화장실이라는 용어 자체를 모르고 살았기에 모두가 화장실이 아닌 뒷간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또한 요즈음에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다음에는 거울을 보면서 간단히 손을 씻는다거나 세수를 하며 실제로 화장품을 바르기도 한다. 그러나 옛날 뒷간에서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아예 그런 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 뒷간(-) 뒤쪽에 있는 방이란 뜻이며 또 다른 말로 측간(廁間)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겠지만 측간이란 말을 쓰기보다는 대부분 뒷간으로 통용되었다.      

 

 지금도 어쩌다 사찰(寺刹)에 가게 되면 화장실을 해우소(解憂所)라고 쓴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역시 용변을 보는 일이 오래 걸리는 사람은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변을 보는 동안 근심과 걱정을 풀어보라’ 뜻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뒷간과 처가는 멀리하라‘는 말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즉, 뒷간이 살림집과 가까이 있으면 고약한 냄새가 날 뿐만 아니라 뒷간에 있던 오물이 혹시나 사람들이 마시는 우물까지 스며들어 흘러올 수도 있기 때문에 멀리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옛날에는 우물이 앞마당에 있는 집이 많았음)    

   

  그리고 처가가 가까이 있으면 사위가 어려운 일이나 구차한 일이 생길 때마다 처가에 가서 손을 벌리게 될 수도 있으며, 또한 가족 중에 안 좋은 일이나 병에 걸렸을때에도 쉽게 알려지게 되면 처가에 걱정을 끼쳐드리게 된다는 뜻에서 생긴 말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어쨌거나 그 시절의 뒷간은 요즈음의 화장실과는 너무나 차이가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의 뒷간은 배설물 처리방법도 너무나 지저분하고 더러웠으며 뒷간 근처로 지나가기만 해도 고약한 냄새가 진동을 해서 코를 꼭 막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요즈음은 대변이나 소변을 보는 대로 자동으로 배설물이 물에 깨끗이 씻겨 내려가지만, 그때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배설물을 거름으로 쓰기 위해 어느 가정이나 뒷간에 그대로 보관했다. 그리고 그 배설물은 거름으로 사용하기 위해 논이나 밭으로 운반해 가기 전까지는 뒷간에 그대로 남은 채 썩으면서 쌓여 있어서 당연히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를 수밖에 없었다.       


  1.  소변      


낮에 소변을 보고 싶을 때는 수시로 뒷간에 가서 소변을 볼 수 있지만, 밤에는 멀리 떨어진 뒷간까기 가서 볼일을 보기가 번거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어느 집이나 방에 요강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밤에 잠을 잘 때는 누구나 방에서 요강에 소변을 보면서 지냈다.     

 

 요강은 대부분 사기로 만들어진 제품이었으며 뚜껑이 있어서 소변을 보고 난 뒤에 는 반드시 뚜껑을 덮어놓곤 하였다. 그래야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기요강도 없는 집에서는 미군 부대 등에서 구해온 커다란 분유 깡통을 구해다 요강 대신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맨 처음에 빈 깡에 소변을 볼 때는 소변 보는 소리가 요란해서 다른 방에서도 크게 들리기도 하였다.      


 물론 지금처럼 소변이나 대변을 보고 난 뒤에 위생적으로 손을 깨끗이 씻는다는 것은 엄두조차 내지 못할 일이며 누구나 그런 생각조차 못하고 그저 그런 거려니 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얼마쯤 세월이 지난 뒤에는 사기요강이 점차 사라지면서 스테인레스로 된 요강이 새로 나왔다. 스테인레스 요강은 보기에도 깨끗했지만 사기보다 훨씬 가벼워서 소변이 가득 찬 요강을 들고 다니기에도 훨씬 편했다.      


한번 가득 찬 요강은 누군가가 그때마다 깨끗이 닦아놓아야 하는데 스테인레스 요강은 사기요강보다 훨씬 가벼워서 닦기도 편했지만, 무엇보다도 깨뜨릴 염려가 없어서 더욱 좋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대부분 스테인레스 요강을 사용하게 되었다.      


온가족이 밤새도록 본 소변은 그 이튿날 아침에 어김없이 뒷간으로 들고 가서 재에 쏟아붓거나 뒷간에 마련된 오줌통에 붓곤 하였다. 소변 역시 농사를 지을 때 거름으로 요긴하게 쓰였기 때문이었다.     


식구들이 많은 집에서는 식구들마다 밤새 소면을 보게 되면 요강이 가득 차게 된다. 그렇게 되면 누군가가 자다가 일어나서 어쩔 수 없이 뒷간으로 들고 가서 쏟아버리고 요강을 깨끗이 닦아 놓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가끔은 캄캄한 밤중에 요강에 소변이 가득 찬 줄도 모르고 그냥 소변을 보게 될 경우, 그때마다 큰 소동이 자주 벌어지기도 하였다. 불이 없는 캄캄한 밤이었기 때문에 소변이 요강 위로 흘러넘치는 줄도 모르고 볼일을 보다가 삽시간에 방바닥이 온통 소변 바다가 되는 차마 웃지 못할 어처구니 없고 망신스러운 사건이 종종 벌어지곤 하였던 것이다.      


옛날에는 대부분 내 방이 따로 없었다. 어느 집이나 방 하나에 여러 식구가 모여서 같은 이불을 덮고 잠을 자곤 하였다. 그러기에 요강에서 흘러나온 오줌은 그대로 삽시간에 이불을 흠뻑 적시게 되고, 그렇게 되면 식구들이 모두 기겁을 해서 일어나서 등잔불을 켠 다음 대소동이 벌어지곤 하였다. 그야말로 비상사태가 벌어지곤 하였던 것이다.      


  2. 대변      


 앞에서도 잠깐 설명했듯이 한밤중에는 소변을 보고 싶을 때는 그나마 요강으로 해결한다지만, 대변은 요강으로 해결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어린 아기들이나 환자는 가끔 요강에 보게 하는 일도 종종 있기는 하였지만…….     


 그러기에 밤중에 갑자기 대변을 보고 싶다면 별수 없이 뒷간에 가야 하는데 여간 귀찮고 두려운 게 아니었다.      

지금처럼 뒷간을 전등불로 환하게 밝힐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랜턴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캄캄하고 어두운 밤길을 걸어서 가야만 했다. 그러기에 혼자 뒷간에 간다는 것은 여간 배짱이 두둑한 사람이 아니고는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꺼리는 곳이 바로 뒷간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옛날부터 뒷간에서는 밤마다 알귀신이나 도깨비가 나온다는 낭설도 많이 들어봐서 여간 담이 큰 사람이 아니고는 혼자 뒷간에 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사정이 급한데 안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별수 없이 식구 중에 누군가를 깨워서 같이 가야만 했다.      

아마 오래전에 독립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보신 분은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는다. 주인공인 할머니가 용변을 보기 위해 뒷간에 갔을 때 할아버지가 밖에서 지켜주며 할머니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노래를 불러주었던 정겨운 광경을…….     


옛날에는 대부분 실제로 어느 가정이나 그랬다. 누군가가 용변을 보기 위해 뒷간에 들어가면 한 사람은 용변이 끝날 때까지 뒷간 문앞에 서서 노래를 불러주거나 두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웃기는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곤 하였다.      


  3. 뒷간의 구조       


옛날에는 요즈음과 달라서 뒷간은 대부분 출입문조차 없는 집이 많았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를 일이지만 실제로 그랬다.   

 그나마 어떤 집은 문짝 대신 짚으로 엮은 거적을 매달고 사용하였으며 그 거적때기 문을 손으로 밑에서 잡고 들어 올리며 드나들곤 하였다. 그리고 드물게는 널빤지가 달린 문을 여닫으며 드나들기도 하였는데 그런 문이 달린 것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집 뒷간이라 할 수 있었다. 널빤지조차 너무 귀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뒷간 안의 구조 역시 너무 지저분하고 더럽기 짝이 없었다.        


뒷간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면 대부분 뒷간 오른쪽 바닥에 큼직하면서도 넓적한 돌멩이 두 개가 약간의 사이를 두고 벌려 놓여 있었다. 뒷간 바닥 역시 물론 흙으로 된 맨 땅바닥이었다. 그 두 개의 돌멩이는 양쪽 발을 각각 하나씩 올려놓고 용변을 보도록 고정해 놓은 돌멩이었다.       

 

그리고 어느 집 뒷간을 가나 돌멩이 앞에는 아궁이에서 타고 남은 재가 항상 산더미처럼 높게 쌓여 있게 마련이다. 그 재는 끼니때마다 아궁이에 불을 때고 난 뒤에 아궁이 속에 남아있는 재를 고무래로 긁어서 삼태기에 담아 갖다 버린 재였다.      


용변을 보게 될 때는 반드시 돌멩이 앞에 쌓여 있는 재를 고무래로 두 개의 돌멩이 사이로 긁어 놓은 다음 소변이나 대변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용변이 끝나고 나면 다시 고무래로 재와 섞인 자신이 본 용변을 뒤로 밀어 던지게 된다. 그렇게 해서 소변과 대변이 섞인 재는 늘 산더미처럼 뒷간 뒤에 쌓이게 된다. 마치 피라미드처럼…….     


그렇게 해서 뒤에 쌓인 재는 가을에 추경 등, 농사를 지을 때 거름으로 요긴하게 사용하곤 하였다. 그만큼 소변이나 대변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자기 집 뒷간이 아닌 다른 집 뒷간에 가서 볼일을 보지도 않았다. 그 정도로 소변이나 대변을  귀하게 여겼던 것이다.     

   

 4. 소변통과 대변통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뒷간의 구조는 대부분 땅바닥에 돌멩이 두 개를 올려놓고 그 위에 올라앉아서 볼일을 보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차츰 형편이 나아지고 있는 집에서는 뒷간 옆에 둥근 모양, 혹은 네모 난 모양의 커다란 시멘트 오줌통을 만들어 놓고 소변과 대변을 따로 분리해서 모아놓곤 하였다.    

  

또 드물게는 소변과 대변을 함께 볼 수 있는 뒷간도 있었다. 땅바닥이 아닌 커다란 시멘트 통 위에 널빤지를 얹어 놓고 그 위에서 대소변을 볼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시절에는 매우 신식 뒷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신식이라고는 하지만 그 역시 불편한 점도 많았다. 특히 주로 대변을 볼 때 흔히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즉 대변과 소변이 가득 들어있는 분뇨통에 아무 생각없이 대변을 보다가 보면 갑자기 통에 고여있던 오줌과 대변이 첨벙소리를 내며 튀어 올라와 순식간에 소변과 대변이 섞인  ⃝물이 튀어올라 엉덩이를 흠뻑 적셔놓는 지저분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그보다 더 더럽고 지저분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특히 여름철이었다. 분뇨통 속에 분뇨와 함께 보기만 해도 끔찍한 구더기 떼들이 서로 엉겨 바글바글 득시글거리며 꼬물거리고 있어서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헛구역질이 나면서 밥맛까지 잃게 하곤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혹시 소지품을 가지고 있다가 실수로, 또는 뒷주머니 속에 있던 물건이 통속에 떨어뜨렸다 하면 그대로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만일 그 속에 어떤 물건을 빠뜨리게 되면 건져낼 수도 없을뿐더러 가령 건져낸다 해도 너무 더러워서 다시는 사용할 수도 없었다.      

     

5. 뒷간이란 명칭이 변소로 발전     


시골 동네 안에서만 뛰놀다 보니 어느덧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학교에 입학해 보니 학교 뒷간은 지금까지 집에서 사용해 오던 뒷간과는  구조가 너무나 달랐다. 한마디로 그 구조가 너무나 위생적이었으며 멋이 있었다.     

화장실의 명칭도 지금까지 써오던 뒷간과 달리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대로 모두들 변소라도 불렀는데 그 변소라는 이름조차 너무나 세련되고 멋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집에 와서는 왠지 변소라고 부르지 않고 여전히 뒷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학교의 화장실은 여전히 교실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건물에 칸칸이 막힌 화장실이 있었는데 칸칸이 막힌 화장실은 주로 대변을 볼 때 사용하는 화장실이었다.      


남학생들이 소변을 볼 때는 횡대로 길게 여러 명이 한꺼번에 서서 소변을 볼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소변이 떨어지는 곳은 시멘트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중앙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있어서 소변을 보면 그 속으로 모두 졸졸 흘러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는데 참으로 신기했다.     

 

칸칸이 막힌 화장실은 여학생들이 사용하도록 만든 화장실이었다. 특별히 남학생용과 여학생용이 구별되지 않아서 남학생들도 대변을 보고 싶을 때는 여학생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을 같이 이용하곤 하였다. 다만 화장실 문에 두 칸이나 세 칸은 교사용이라는 푯말이 붙어있어서 아주 급할 때를 제외하고는 학생들은 좀처럼 함부로 사용하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화장실이 집보다 훨씬 깨끗해서 너무나 좋았다.      


6. 화장실 청소      


고학년으로 올라가면 저학년 때는 없었던 화장실 청소 당번을 하게 되는 날이 있었다. 교실, 유리창, 교실, 복도, 교무실, 운동장 청소 등을 번갈아 가면서 일주일씩 하게 되었다.       


청소 당번 중 누구나 가장 싫어하는 것이 화장실 청소였다. 학교 화장실은 좀 위생적이며 깨끗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더럽기도 하거니와 냄새가 많이 나기 때문이라 하겠다.     


겨울철의 화장실 청소는 더욱 더 힘이 들었다. 대변을 보는 화장실은 시멘트 바닥에 직사각형 모양으로 뚫린 구멍이 있다. 대변을 볼 때는 정확하게 직사각형 구멍 속으로 정확하게 볼일을 봐야 하는데 간혹 정조준을 하지 못하고 옆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정조준을 못한 대변과 소변들은 겨울철에는 모두 꽁꽁 얼게 된다. 그런데 거기에 물을 붓고 싸리비로 아무리 북북 긁어도 그것들은 좀처럼 떨어져 나가지를 않고 그대로 붙어있게 마련이다.     

  

남학생들이 소변을 보는 곳도 마찬가지이다. 겨울철에는 구멍이 막혀 잘 흘러내려가지 않고 소변이 얼어 쌓이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그런 것들을 완전히 깨끗이 정리하지 않은 채 청소 검사를 맡게 되면, 그리고 엄한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 얼어붙은 대변은 돌멩이로라도 깨뜨려서 깨끗이 하라고 명령을 할 때가 있다.    

  

그리고 남학생들이 본 소변 역시 꽁꽁 얼어서 구멍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는 것을 몇 번이고 돌로 깨뜨려서라도 흘러 내려가게 한 뒤에야 합격을 시킨 뒤에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몹시 지저분하고 냄새가 나고 더럽기 그지없었던 그 옛날 화장실의 추억!     


지금의 생활이 너무나 복에 겨워서일까? 미개하면서도 지저분하기 짝이 없던 그 어렵던 시절이 자꾸만 그리워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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