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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Aug 30. 2022

내가 어렸을 때는(1)

[부끄럽기 그지없는 초등학교 1학년 시절]

1940년대 초, 어느 가을 날.      


난 아주 가난한 농사꾼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 당시에는 어느 집이나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였지만, 특히 우리 집은 더욱 가난했던 것 같다.


쏜살같은 것이 세월이라더니 그게 벌써 눈 깜짝할 사이에 어느덧 81년이란 긴 세월이 훌쩍 지나간 옛날의 일이 되고 말았다.   

  

내가 태어날 때 내게는 이미 6살 위인 누나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누나가 태어난 지 6년 만에 마침내 그처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소망하던 아들이 태어났으니 부모님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리라.  

     

그 당시에는 대부분 어느 가정이나 여자보다는 남자아이를 선호하였다. 대를 끊어지지 않게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아들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우리 가정에서 그처럼 아들이 태어나기를 애타게 갈망하게 된 것은 내가 2대 독자인 귀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어느 집이나 형제들이 적어야 세 명 정도였으며 대부분 대여섯 명씩은 낳아 길렀다. 우리 마을만 해도 자식을 많이 낳은 집은 열 명이 넘는 집도 더러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 후로 나에게는 더 이상 동생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집은 단 남매만 같이 자라며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축복과 사랑을 받으며 태어난 출생도 잠시, 나 자신은 물론 부모님의 입장으로 보아서라도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만 못했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불행의 시작이었다. 안타깝게도 태어날 때부터 내가 너무 허약한 체질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약한 식물에 유난히 진딧물이 자주 낀다고 하였던가. 몸이 허약하다 보니 이틀이 멀다 하고 이런저런 잔병치레로 활동하는 시간보다는 자리에 누워 앓는 시간이 더 많았다. 확실한 병명도 없이 늘 잔병을 달고 살았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으로 비교하자면 애당초부터 불량품으로 생산된 제품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나의 아버님은 허약한 나의 체질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우리 고장에서는 기운깨나 쓰는 장사로 널리 멀리까지 소문이 나서 아버님의 이름만 들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나는 어찌 보면 기운깨나 쓰는 아버지의 유전이 아닌 돌연변이(?)가 아니면 무녀리(?)로 태어났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의 병이 위독해질 때마다 병원에 가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병원을 가려면 시오리나 되는 읍내에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업혀서 몇 번 병원에 가본 적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얼른 차도를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기에 미신의 숭상이 뼛속 깊이 박힌 부모님은 나의 병이 아주 심해질 때마다 병원보다는 동네 글방 선생님을 찾아가곤 하였다. 글방 선생님을 찾아간 뒤에는 으레 나의 병을 치료한다는 구실로 아까운 흰밥을 지어서 바가지에 하나 가득 담아 허수아비와 함께 성황당이나 대감나무 밑에 갖다 바치고 비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잔병치레를 하는 동안에도 세월은 잠시도 쉬지 않고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덧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입학할 나이가 가까워지자 또다시 우리 집에는 큰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학교가 시오리나 되는 먼 거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도 몸이 너무 약한 나는 그 먼 거리를 걸어서 다닐 수가 없을 정도로 쇠약했다. 결국, 식구들이 여러 날 고심 끝에 번갈아 가며 하루씩 나를 업고 등하교를 시켜주기로 하였다.

     

매일 등교를 할 때마다 가족들 중에 한 사람이 나를 등에 업고 학교 교문 앞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가곤 하였다. 가족이라야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누나가 전부였다.     

 

등교를 할 때만 업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학교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에도 어김없이 식구들 중에 한 사람이 시오리 길을 미리 걸어와서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업고 집으로 돌아가는 힘든 일이 매일 되풀이되곤 하였다.


그런 모습을 본 동네 친구들이나 학교 친구들, 그리고 다른 아이들 모두가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가 없었다. 동정은커녕 듣기 싫은 소리로 놀려대기가 일쑤였다.    

  

난 그런 놀림과 손가락질을 받을 때마다 몹시 창피하고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학교가 싫었다. 그리고 그들이 몹시 원망스러웠으며 건강하게 잘 걷고 잘 뛰어다니며 힘차게 어울려 노는 그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매일 아이들의 놀림을 받게 된 나는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교문 앞까지 업어다 주지 말고 학교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내려 달라고 하였다. 그래야 내가 업혀 다니는 모습이 아이들의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었다.     


공부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교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미리 와서 기다렸다가 업고 가곤 하였다.  아마 이렇게 업혀서 학교에 다닌 사람은 이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으리라.      


어쩌다 혹시 혼자 있을 때는 친구들에게 툭하면 매를 얻어맞거나 따돌림을 당하기가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워낙 몸과 마음이 약하다 보니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저항할 용기도 없었다. 그런 나날을 보내다 보니 친구들과 한창 사이좋게 놀며 추억을 쌓아야 할 어린 나이에 친구들이 모두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으며 무섭고 원망스러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결국, 한창 친구들과 어울리며 신나게 뛰어놀아야 할 어린 시절이었지만 요즘 말로 일찌감치 왕따를 당하면서 외롭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으니 참으로 불행한 상처이며 기억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세상이나 그렇긴 하지만, 아이들 세계에서도 약육강식의 법칙이 벌써부터 분명히 통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렇지만, 강자, 즉 힘이 세거나 조금 있는 집 아이들에게는 아이들 모두가 잘 따르고 모여들지만, 가난한 집안의 약자에게는 늘 우습게 여기고 함부로 대하는 것이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통하고 있다는 것을 어린 나이였지만 일찌감치 터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학교는 물론이고 마을에서도 늘 숨을 죽인 채 친구들의 눈치나 살피면서 외롭고 불안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몹시 불행한 나날이며 큰 상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1학기가 지나가고 그해 가을이 되었다.      


가을이 되자 나에게는 또다시 몹시 괴롭고 힘든 장애물과 같은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학교에서 다름 아닌 가을 대운동회를 한다는 소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학교 친구들은 물론, 동네 아이들 모두가 운동회를 한다는 말에 벌써부터 미리 들뜬 마음으로 운동회 날이 어서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오뉴월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했던가.      


운동회 날은 뭐니뭐니 해도 몸이 건강하며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들이 더욱 운동회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으리라. 그리고 부모님과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달리기 솜씨를 마음껏 뽐내고 과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운동회였기 때문이었다.   

   

머리 위에서는 만국기가 온통 하늘을 덮고 나풀거리며 춤을 추는 너른 운동장, 그리고 많은 구경꾼들이 성을 쌓은 듯 겹겹이 둘러싸인 운동장에서 달리기 실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절호의 날이 바로 운동회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 마을의 이웃과 우리 고장 사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머리에는 청백군 띠를 질끈 동여매고 마음껏 힘차게 달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도록 즐겁고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나 하나만 빼고 모두가…….     


하지만 워낙에 몸이 약해서 학교에도 겨우 업혀 다니고 있는 나에게 달리기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렇다고 달리기를 할 힘이 없으니 처음부터 포기하고 나만 빼달라고 선생님에게 부탁을 해볼까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지만, 만일 그렇게 한다면 친구들에게 더욱 놀림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가는 날짜를 누가 막을 수 있던가!      


마침내 운동회, 아니 운명의 날이 돌아오고 우리 반 달리기 차례가 되었다.     


나와 같은 반 우리 동네 몇몇 친구들은 이미 나보다 먼저 달리기에서 3등 안에 들어 상품으로 공책을 받아들고 보란 듯이 부모님에게로 자랑스럽게 달려와서 공책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내게는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결국 내가 뛸 차례가 되었다. 난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여섯 명이 1조가 되어 출발선에 섰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벌써부터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방망이질을 하며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곧 쓰러질 것처럼 현깃증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탕탕!!“     


마침내 귀청을 찢을 듯한 요란스러운 총소리에 가뜩이나 두근거리는 나의 심장이 곧 멎을 것만 같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눈앞이 캄캄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코 꼴찌는 하지 않으리라!‘     


총소리가 울리기가 무섭게 난 죽을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비록 등수 안에 는 들지 못해 공책은 받지 못한다 해도 꼴찌만큼은 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젖먹은 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어금니까지 굳게 물고…….     


어떻게 된 일인지 그날따라 나의 달리기 속도가 여느 때와는 달리 매우 빠르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속력과 힘으로 계속 달린다면 1, 2등은 못해도 3, 4등은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하였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꼭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순간적으로 잠깐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내 뒤를 따라 달려오고 있는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되나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그토록 죽을 기를 써가면서 달렸는데, 그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두 눈을 꼭 감은 채 어금니까지 꽉 다물고 사력을 다해 달렸는데, 내 뒤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모두가 저만큼 내 앞에서만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난 그때부터 다시 죽을 힘을 다해 힘껏 달린 결과 그나마 다행히도 겨우 꼴찌는 면하고 뒤에서 두 번째로 골인하는 부끄러운 결과를 얻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난 결승선에 다다르자마자 너무나 지치고 힘에 겨운 나머지 그 자리에 그만 고꾸라지듯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그런 나를 본 우리 가족들은 쓰러진 나를 부축해 일으키면서 정말 잘 뛰었다는 칭찬과 함께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모두 지워버리고 싶은 나만의 부끄러운 추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난 지금도 가끔 그때의 운동회 날을 회상하면서 나 자신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짓곤 한다. 그리고 그때의 그 부끄러웠던 추억이 어쩌면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 길잡이가 되기도 한 것 같다.       


그렇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끔 뒤를 돌아본다는 것!     


그것은 비단 나만의 일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뒤를 돌아보는 일은 비단 운동회 때 달리기에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리라.    

  

마치 운동회 때에 두 눈을 꼭 감고 달리기를 하다가 뒤를 돌아보지만 않았다면 그 날도 꼴찌를 면치 못했을 나의 부끄러운 경우처럼…….     


만일 운동회 때에 끝까지 눈을 꼭 감고 달리기만 하고 잠깐 뒤를 돌아보지 않았던들, 그리고 눈을 꼭 감은 채 꼴찌인 줄도 모르고 계속 눈을 감은 채 앞만 보고 달렸다면 그날 과연 꼴찌를 면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렇게 잔병치레를 자주 하는 바람에 결석을 하는 날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학년을 마칠 때까지 1년 동안 겨우 수업일수에 반에서 조금 더 채운 출석일자가 통지표에 고스란히 남이 있다.    

   

난 1학년 때 받은 생활통지표우등상장을 6.25 전쟁을 겪으면서도 고이 지니고 다닌 끝에 약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비록 빛바랜 모습이긴 하지만 무슨 보물이라도 되듯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 )


                - 나의 학창 시절(1) 끝-

                   - (2)회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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