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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Jan 02. 2023

내가 어렸을 때는(12)

[중학교 입학 시험]

1950년대 중반, 그때는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입학시험 제도가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시골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달랑 하나뿐이니 당연히 입학시험 비율도 따라서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6학년 2학기가 되자 우리 반 학생들 모두는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과외 수업을 받게 되었다. 과외 수업은 학교 공부가 끝난 다음에 곧이어 밤에 담임 선생님이 맡아서 가르치게 되었다.      


낮에는 천막 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저녁때가 되면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서원(조선시대 선비들이 모여 유학을 익히던 곳, 그리고 충절을 지키다가 죽은 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자리를 옮겨 공부를 하게 되었다. 마침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얻어 빌리게 되었던 것 같다.     

   

집에서는 어느 집이나 늘 등잔불 밑에서 시커먼 연기를 마셔가며 바느질이랑 공부 등을 했다. 등잔불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꺼지는 바람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때마다 성냥불로 등잔불을 다시 붙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성냥도 귀해서 마음대로 쓸 수도 없었다. 그래서 성냥 대신 관솔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관솔은 소나무 속살을 대패밥처럼 길게 썬 다음 그 끝에 화롯불에서 끓여 녹인 유황을 찍어서 만든 성냥 대신 쓸 수 있는 임시 대용품이었다. 


그러나 서원에 가서 공부할 때는 석유 등잔 대신 남포를 사용하였다. 남포란 또 다른 말로 등피라고도 불렀는데 불이 꺼지지 않게 그 겉에 아주 얇은 유리로 된 것을 씌워서 여간해서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남포불은 등잔불에 비해 마치 전깃불이라도 들어온 듯 정신이 번쩍 날 정도로 너무 환했다. 그렇게 환한 남포불을 서너 군데 켜놓고 밤늦게까지 선생님이 가르치는 공부를 하게 되었다.  습관이란 참 대단한 것 같았다. 전깃불처럼 환한 남포불 밑에서 공부를 하다가 등잔불을 켜면 그렇게 어두울 수가 없었다.    

남폿불을 하룻밤 동안 사용하고 나면 겉에 씌운 유리가 그을음으로 너무 새까맣게 되어 손으로 닦아야만 했다. 그런데 유리가 너무 얇아서 닦다가 깨드리기가 일쑤였다. 그렇게 되면 유리를 파는 곳에 가서 다시 사서 씌워야 하는 불편이 뒤따르곤 하였다.      

  

서원에서 공부를 할 때 선생님은 으레 문이 열려있는 다락 문턱에 걸터앉아 가르쳤다.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비좁은 방바닥에 꼭 끼어앉은 채 선생님이 가르치는 대로 배울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단 한 명이라도 중학교에 더 합격시키기 위해 여전히 몽둥이를 손에서 놓지 않고 학생들이 졸거나 모를 때마다 여지없이  무서운 매질을 가하곤 하였다. 공부 시간이 아니라 무서운 공포의 시간이어서 마음 놓고 졸 수도 없었다. 졸다가는 여지없이 뭇매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서원에서 밤늦게까지 공부를 끝내고 나면 그제야 학생들은 겨우 자유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는 바로 그 자리에 이불을 펴고 다 같이 단체로 잠을 자곤 하였다. 그리고 아침이 밝으면 다시 학교 울타리 옆에 친 천막 교실로 이동하여 공부를 하는 일이 매일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곤 하였다.      


그렇게 고생을 하며 공부를 했지만, 만일 중학교 시험에 떨어지게 되면 중학교 진학을 아예 포기하거나 재수를 하곤 하였다. 그것도 아니면 고등공민학교라는 곳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고등공민학교는 일반 중학교와 똑같은 중학교 교과 과정을 가르치는 학교였다. 그러나 인기가 별로 없었다. 막상 그 학교를 졸업했다 해도 정규 중학교 졸업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정규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중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한다는 것은 제법 비율이 높아서 어려운 편이었다. 아마도 이 지방에서는 단 하나뿐인 중학교여서 입학을 하려는 학생들은 많고 학교에서는 정해진 학급수가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아무튼 그러기에 누구나 중학교 시험만은 꼭 합격해야 되겠다는 각오로 죽을 기를 쓰고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중학교 입학 시험 발표를 하던 날       


그 지겹기 짝이 없는 6학년 공부를 모두 마치고 마침내 입학시험 날짜가 다가왔다. 그리고 바로 합격자 발표를 하던 날, 여기저기에서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학부모와 같이 온 수험생들은 물론이고 한해동안 6학년을 가르쳤던  담임 선생님들이 모두 모여 불안하고 초조한 표정으로 웅성거리며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어쩌면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의 풍경이 이 정도였을까? 그야말로 오늘은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이 이곳으로 집중된 순간이었다.     

 

합격자 발표는 학교 교실 벽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흰 종이에 붓글씨로 커다랗게 쓴 합격자 수험번호가 길게 게시되어 있었다.      


수험번호는 시험 성적에 따라 순서대로 게시된 것이라고 하였다. 수험번호를 찾기 위해 종이가 뚫어질 정도로 바라보며 확인하고 있는 학생들이나 담임 선생님, 그리고 학부모들의 표정은 곧 웃고 우는 희비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합격했다며 서로 부등켜 안고 펄쩍펄쩍 뛰고 맴을 돌며 미친 듯이 좋아서 소리소리 지르는 사람, 엉엉 소리 내어 우는 사람, 엉엉 소리내어 우는 사람, 우거지상이 된 표정으로 벽에 적혀 있지도 않은 수험번호를 넋을 잃고 계속 훑어보며 찾아보고 있는 사람들로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이루고 말았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나는 운이 좋았음인지 아니면 그동안 선생님의 무서운 매질 덕분인지 분명히 내 수험번호가 게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구나 일천 명이 가까운 수험생들 중에 열두 번째에 내 수험번호가 적혀 있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이 꿈인지 아니면 생시인지!     


난 2학년 1학기를 다니던 중에 6. 25 전쟁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피란 생활을 반복하다가 휴전이 되자 2,3,4학년 과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생략한 채 바로 5학년 2학기로 올라가게 되었다. 결국, 3년이란 긴 세월 동안 학교 공부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5학년으로 월반을 했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일천 명이 가까운 응시자 중에 12위를 했다니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모두가 선생님의 매가 너무 두려운 나머지 살아남기 위해 매일 새벽 두 시까지 코피를 쏟으며 등잔불 밑에서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공부한 노력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동안 나를 그토록 귀찮게 괴롭히던 우리 이웃의 친구인 반장은 입학시험에 그만 불합격이 되고 말았다. 그 친구와 아버지는 너무나 기분이 상하고 창피했는지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슬그머니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합격자 발표를 하던 날, 나는 아버지와 함께 갔었다. 아버님 역시 내가 너무 대견스럽고 기분이 좋았는지 담임 선생님에게 술이라도 한잔 대접한다며 선생님을 모시고 학교에서 가까운 읍내 장으로 발걸음을 옮겨놓게 되었다.      


아버지와 나는 선생님을 모시고 읍내의 어느 중국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고작 짜장면과 술을 간단히 대접하게 되었다. 그때 난생처음 먹어본 기가 막힐 정도로 맛이 있었던 짜장면의 맛은 지금도 좀처럼 잊혀지지를 않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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