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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Jan 27. 2023

학(虐)을 뗄 정도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던 추억

[손목시계가 탐이 나서]

우리는 ’학을 떼다‘란 말을 가끔 듣기도 하며 사용하기도 한다. 이와 거의 비슷한 의미로 ’진을 뺀다‘는 말을 쓰기도 한다.    

’학을 떼다‘에서 ’학(虐)‘이란 원래 ’학질(虐疾)‘이란 전염병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그만큼 학질이란 병에 걸리면 고통스럽고 괴로움은 물론 이 병으로부터 좀처럼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뜻에서 생겨난 말이라 하겠다.      

학질은 주로 학질모기에 의해 전염되는 병으로 일명 말라리아라고불리우기도 한다. 그리고 6.25 한국 동란 때 우리나라에도 많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학질과 빈대는 특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나라에서 많이 발생한다는 말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학질(虐疾)이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병인지 학질에 걸려본 사람들만이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만큼 학질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몹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게 되며 심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무서운 병이기도 하다.      

일단 학질에 걸리게 되면 아무리 무더운 삼복더위라 해도 너무 추워서 온몸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으슬으슬 떨리고 추워서 몸이 저절로 부들부들 떠는가 하면 그와는 반대로 어느새 열이 오르내리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학질에 걸린 사람을 곁에서 지켜보는 제3자로서는 저절로 웃음이 나오기도 하는 재미있는 병이기도 하다.        

왜냐 하면 푹푹 찌는 한여름 대낮에도 너무 추워서 덜덜 떨다 못해 땡볕에 나가 담요나 포대기를 온몸에 둘둘 감고 앉아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게 된다. 그래도 여전히 덜덜 떨리는 병이 바로 이 학질의 증상이니 이 광경을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겠는가.   

학질을 다른 말로는 하루거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루는 그렇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앓다가도 그다음 날이 되면 언제 그랬더냐는 듯 멀쩡하게 낫다가 다시 다음 날이면 또 그런 증세가 지속되는 일을 반복하게 되는 병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 번 걸리게 되면 여간해서는 낫지를 않는 끈질긴 질병이바로 학질인 것이다. 그러기에 ’학을 뗀다‘란 말은 일반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람, 혹은 어떤 일이 너무나 괴롭고 지겨워서 그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과 진이 빠지며 결국 질려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할 때 쓰이기도 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오래전, 나 역시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게 그야말로 학을 뗄 정도로 진을 빼게 했던 기억이 되살아나곤 한다. 그리고 문득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져 나오곤 한다.      






50년대 중반 경,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의 일이었다.    

나는 학교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가끔 읍내 장을 거쳐 올 때도 있었다. 내가 지름길로 오지 않고 읍내 장으로 돌아오곤 하는 것은 주로 새로 나온 월간 잡지를 잠깐 훔쳐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가끔 지우개나 연필, 그리고 잉크나 펜 같은 학용품을 구입할 때도 읍내 장에 가곤 하였다.    

읍내 장에는 제법 큰 책방 하나가 있었다. 책방에 가면 다달이 새로 나오는 월간 잡지들이 많았다. 기억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여원‘이나 ’학원’, 그리고 ‘명랑’ 등의 잡지가 나오곤 했는데 그런 잡지에 다달이 연재되는 글을 몰래 읽어 보기 위해서였다.  그중에서도 박기당 작가와 김종래 작가가 연재하는 아슬아슬하면서도 스릴이 있는 이야기에 더욱 흥미와 궁금증을 느끼게 되었다.   

책을 구입해서 볼 그럴만한 형편이 아니었기에 번번이 책방 주인 몰래 책을 훔쳐 보곤 하였다. 책방 주인이 책장을 함부로 넘기지 못하게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책장을 넘길 때 구겨지거나 때가 묻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달이 연재되는 다음 글이 어찌나 궁금하면서도 읽고 싶었는지 책방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몰래 읽어 보기 위해 번번이 들르곤 하였다.     
읍내 장에는 책방뿐만이 아니라 여기저기 구경거리도 많았다. 더구나 5일 장이 서는 날이면 볼거리들이 더욱 많았다.   

우(牛)시장에 팔리기 위해 나온 수많은 소들, 그리고 돼지와 닭, 강아지와 오리 등 가축들도 많았다. 대장간에서는 불에 달군 시뻘건 쇠붙이로 쉬지 않고 호미와 낫 도끼, 부엌칼 등을 만들고 있었으며, 옷이나 가정용품 등 일용품들 모두가 구경거리들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책방이나 가게에 진열된 각종 물건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 대신 나도 모르게 저절로 시계방 앞을 자주 가게 되었다. 그리고 밖에서 시계방 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곤 하는 것이 습관이 되고 말았다.      

제법 큼지막한 시계방 벽이나 기둥에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모양의 괘종시계들이 저마다 쉬지 않고 재깍거리는 소리를 내며 매달린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밖에서도 자세히 볼 수 있는 진열대에는 멋지게 생긴 갖가지 손목시계들이 번쩍거리는 광채를 내며 진열된 채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검정색 가죽 끈이 매달린 손목시계가 그렇게 마음에 들고 군침이 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언감생심, 그 귀하고 고급스러운 손목시계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값도 비쌌지만 더구나 가정형편이 넉넉지 못한 나로서는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다.      

그만큼 시계가 귀했던 시절이어서 어른들도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는 사람이 극히 드물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서 손목시계를 차고 다닌다는 것은 일종의 부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어느 날, 그날도 나는 학교 공부를 마치기가 무섭게 어느새 시계방 앞으로 와서 시계를 들여다보며 연신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만일 내가 저 시계를 손목에 차고 다닌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 해도 가슴이 떨리도록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며칠째 그런 상상을 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번쩍하고 번개처럼 떠오르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고 말았다.  


옳지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그때 번쩍하고 번개처럼 갑자기 수학여행비가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까지 학교에 낸 수학여행비로 시계를 사고 싶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우리 학교에서는 다달이 얼마씩 돈을 걷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학년 말에 가게 될 수학여행비를 미리부터 걷는 것이라고 하였다. 수학여행지로 정한 곳은 경주였으며 기차를 타고 가는 여행이었다.      


그때 수학여행비를 다달이 나누어서 걷게 된 것은 어느 가정이나 한꺼번에 수학여행비를 마련하기가 벅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리부터 분납하게 하는 일종의 학교 측의 배려가 아닌가 짐작할 뿐이었다.     

  

우리 집 역시 매우 가난한 편이었지만, 수학여행만큼은 다녀와야 한다며 다달이 수학여행비를 어렵게 마련해 주곤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수학여행 날짜가 한두 달 앞으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그다음 날은 마침 토요일이었다. 난 오전 수업을 마치자마자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리고는 거짓말로 그럴듯하게 가정 핑계를 대며 수학여행을 못 가게 된 이유를 설명하게 되었다.    

  

그러자 자초지종을 듣게 된 담임 선생님은 사정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그동안 내가 낸 수학여행비 모두를 시원스럽게 돌려주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제법 큰 돈이었다.  

    

‘얏호!’     


난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신바람이 나서 한걸음에 읍내에 있는 시계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조금 흥분된 목소리로 그동안 눈독을 들여왔던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얼마냐고 주인 아저씨에게 묻게 되었다.      


아뿔싸그런데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내가 가지고 온 돈만 있으면 넉넉히 그 시계를 손에 넣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가지고 온 수학여행비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 돈으로는 겨우 시계값의 반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난 그만 맥이 한꺼번에 쭉 빠지는 바람에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수학여행비를 도로 학교에 내고 다시 여행을 가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기에 진퇴양난, 절대로 이대로 순순히 물러설 수가 없었다. 기어이 시계를 내 손에 꼭 넣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절박한 기로에 놓여 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난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용기를 내어 아저씨를 향해 다시 사정하듯 입을 열었다.      


아저씨이 돈으로 그 시계를 그냥 주시면 안 될까요그렇게 해주세요?”     


그러자 한쪽 눈에 돋보기를 끼고 열심히 시계를 고치고 있던 주인 아저씨가 일손을 잠시 멈추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어림도 없는 소리라며, 그리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버럭 소리를 지르며 한마디로 딱 잘라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옛기 이 놈아어느 정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난 지금 바쁘니까 헛소리 좀 그만하고 정 그 시계를 사고 싶다면 집에 가서 돈을 더 가지고 오란 말이야알겠냐?”      


…….”     


아저씨는 이렇게 대꾸하고는 다시 돋보기를 한쪽 눈에 끼고 하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난 그만 시무룩한 표정으로 마치 파출소에 잡혀 온 죄인이라도 된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다시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계를 열심히 고치고 있던 시계방 주인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더니 내가 여전히 앉아 있는 모습을 바라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소리쳤다.    

  

얀마너 왜 집에 가지 않고 여태 앉아 있어어서 가란 말이야!”      


아저씨가 소리치자 난 고개를 들고 애원하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값에 그냥 주시면 안 돼요?”     


글쎄그 돈으로는 어림도 없다니까 왜 자꾸만 그래반값도 안 되는 돈을 받고 밑지고 팔란 말이니제발 헛소리 그만하고 얼른 집으로 가란 말이야!”     


아저씨는 여전히 귀찮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다시 시계를 고치기 시작했다. 내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꼴조차 보기 싫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런 웬수가 또 어디 있느냐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러나 난 갑자기 돌덩이라도 된 듯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러는 동안 길고 긴 여름날의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시계방 아저씨가 다시 나를 바라보며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이번에는 학을 떼겠다는 듯 그리고 오히려 나에게 사정하듯 처음보다 훨씬 지친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희 집이 멀다면서 왜 여태까지 안 가고 그냥 있어벌써 해가 넘어가고 있잖아제발 어서 가란 말이야.”      


나는 이때가 기회다 하고 다시 아저씨를 바라보며 애원을 하게 되었다. 


그 값에 그냥 주시면 안 돼요?”     


글세 안 된다니까 그러니안 돼어서 가라니까 그러니.”     


아저씨의 조금 전보다 더 지친 듯 더욱 작고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꾸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 조금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러는 동안 사방은 이미 어둑어둑해지며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자 아저씨는 가게 문을 닫아야 한다며 어서 가라고 재촉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난 어디서 그런 배짱이 생겼는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시계를 안 주면 절대로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다는 듯이…….     


날은 이미 컴컴해지고 있었다. 난 다시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그 시계 주시면 안 돼요?”     


그러자 아저씨는 나를 한동안 아무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너한테는 못 이기겠다는 듯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가지고 가라 가지고 가정말 너처럼 끈질긴 놈은 보다보다 처음 보겠다.”      


아저씨가 드디어 항복을 하며 시계를 꺼내주고 말았다. 아아!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결국 시계를 내 손에 넣은 나는 그렇게 신바람이 날 수가 없었다. 바람을 잔뜩 넣은 풍선처럼 가슴이 마냥 부풀기도 하였다. 난 아저씨에게 허리를 굽혀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결국 그 뒤부터 나는 수학여행을 가는 대신 자랑스럽게 손목시계를 차고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어쨌거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때 1천 명이 가까운 학생들 중에 시계를 차고 다니는 학생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금도 가끔 그 아저씨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곤 한다. 철부지 학생이 끈질기게 조르는 바람에 결국은 밑지고 팔게 된 그 아저씨의 심정이 얼마나 아팠겠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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