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아침, 할머니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급히 집을 뛰처나갔습니다.
그랬던 할머니가 어떻게 된 일인지 금방 집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마치 물에 흠뻑 젖은 솜뭉치처럼 풀이 잔뜩 죽은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잔뜩 어두워진 할머니의 표정을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습니다.
할아버지가 그런 할머니를 보자 좀 걱정스러운 낯으로 퉁명스럽게 물었습니다.
"흥, 다시는 나를 안 볼 것처럼 뛰쳐나가더니 왜 벌써 내려온 게야?“
”…….“
할아버지의 물음에 할머니는 아무런 대꾸도 없습니다. 할머니는 지금 기분이 몹시 상한 듯 아무 대꾸조차 하기 싫은 모양입니다.
이틀 전, 할머니와 하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습니다.
늘 그랬듯이 아무것도 아닌 아주 사소한 일로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티격태격 다투게 된 것입니다.
할머니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그 길로 어딜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집을 나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할머니는 보나마나 서울에 사는 아들네 집으로 간 게 틀림없습니다. 할아버지와 조금만 틀어졌다 하면 아들네 집으로 달려가곤 했으니까요.
할머니는 이번에도 시골집에 그렇게 할아버지만 동그마니 남겨 둔 채 다시는 안 볼 것처럼 훌쩍 떠나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랬던 할머니가 겨우 이틀 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자 할아버지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궁금해서 몇 번이나 다시 불어봤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대답이 없습니다. 잔뜩 실통이 난 어린아이처럼 심통이 난 얼굴로 아무 대꾸가 없습니다.
이틀 전, 늦은 저녁때가 되어서야 겨우 아들네 집에 도착한 할머니는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그다음 날 아침, 아들네 식구들이 모두 나가기가 무섭게 급히 주방으로 나갔습니다.
할머니는 아들네 집으로 올 때 상수리가루를 가지고 올라왔습니다. 맛있게 묵을 쑤어 식구들에게 맛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시골집 울타리에서는 족히 백 년은 묵었음 직한 상수리나무 한 그루가 우람한 자태를 뽐내며 자라고 있었습니다.
상수리나무에서는 해마다 가을이 오면 어김없이 굵직하고 탐스럽게 살이 찐 상수리 열매가 매달리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상수리가 알차게 여물면 마치 우박이 쏟아지듯 후두둑 후두둑 소리를 내며 땅바닥으로 떨어지곤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해마다 이 상수리를 주워서 정성껏 묵을 쑤곤 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옛날부터 할머니의 묵 쑤는 솜씨는 동네에서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모르긴 해도 얘들이 이 묵맛을 한번 보면 환장들을 할 걸!‘
어느새 묵을 다 쑨 할머니는 식구들이 좋아할 생각을 하니 미리부터 신바람이 났습니다. 입가에 환하게 번진 미소는 가실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학교와 직장에 나갔던 식구들이 모두 돌아오자 할머니는 급히 식구들을 식탁 앞으로 불러냈습니다.
식탁 위에는 금방 만들어 무쳐놓은 상수리 묵이 양푼 가득 놓여 있었습니다.
먹음직스럽게 무친 묵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 정도였습니다.
신바람이 난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너희들 이게 뭔지 알기나 하니? 이게 바로 시골 할머니네 집 상수리나무에서 떨어진 상수리로 만든 아주 귀한 상수리 묵이란다. 자, 어서들 맛을 보렴.”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식구들이 모여 앉아 맛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흘금흘금 식구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습니다.
“어떠냐? 맛이 아주 기가 막히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민수가 먼저 맛을 보기 위해 묵을 한 입 입에 넣기가 무섭게 잔뜩 낯을 찡그리며 도로 뱉어내고 말았습니다. 너무 맵고 짜서 먹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아빠도 엄마도 시큰둥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왠지 엣날에 할머니가 쑤었던 맛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한껏 기대에 부풀었던 할머니의 밝았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지고 말았습니다.
한꺼번에 온몸의 맥이 쭉 빠져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저녁 식사를 대충 끝낸 아들 내외는 슬그머니 저희들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민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숙제가 많다며 아무 말없이 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들네 집에 올라오기만 하면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스럽게 확 풀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시원스럽게 풀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숨이 막힐 것처럼 답답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별 도리없이 거실에 혼자 앉아 있던 할머니는 갑자기 심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참다 못해 슬그머니 민수의 방 앞으로 가서 문을 슬그머니 조심스럽게 열었습니다.
민수는 한창 책상 앞에 앉아서 열심히 숙제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민수야, 아직 멀었니? 할미가 재밌는 엣날 이야기 하나 해줄까? 너 옛날이야기 아주 좋아하지 않았니?“
할머니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민수의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물었습니다.
"할머니, 보나 마나 또 그 얘기 해 주려고 그러시는 거죠?"
민수는 몹시 바쁜 듯 그리고 귀찮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습니다.
"그 얘기라니?"
"할머닌 늘 뒷간의 알 귀신 얘기 아니면, 저수지에서 나타난다는 도깨비 얘기만 또 하고 또 하고 하시잖아요. 오늘은 숙제가 많아서 그런 얘기 들을 시간이 없어요.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고 빨리 나가주세요.”
할머니는 더는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한 채 도로 거실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민수의 태도가 그렇게 서운하고 야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큰마음 먹고 달려온 아들네 집이 이토록 새삼 낯설게 느껴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괜히 올라왔다는 후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도 심심해서 할머니가 이번에는 테레비전을 켰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자 조금 뒤, 이번에는 아들의 방문이 소리없이 열리더니 며느리가 얼굴만 빼꼼히 내민 채 못마땅한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어머님, 텔레비전 소리 좀 줄여 주세요. 민수 아빠도 내일을 더 일찍 출근해야 하고, 민수도 지금 숙제를 하는 중이잖아요.“
”그래, 알았다. 알았어. 그까짓 태레비 내가 안 보면 그만이지,“
할머니는 곧 텔레비전을 끄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거실에 혼자 맥없이 앉아 있기도 거북해져서 그만 방으로 들어가서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생각에 좀처럼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 이튿날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아들네 식구들이 잠이 든 사이에 시골로 내려오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니 왜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게야? 무슨 일이 있었느냐구?“
할아버지는 잔뜩 우거지상이 된 채 입을 꼭 다물고 있는 할머니를 보자 몹시 궁궁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여전히 우거지상을 펴지 못한 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아, 무슨 일이 있느냐고 지금 묻고 있짆아!“
할머니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자,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꽥 소리를 지르며 다시 물었습니다.
”…….“
그래도 할머니는 이번에도 대답이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아까보다 더 큰 소리를 지르며 물었습니다.
"아니, 이젠 점점 귀까지 먹은 게야? 왜 대답이 없느냐구?"
그러자 이번에는 할머니도 할아버지한테 지지 않겠다는 듯 할아버지를 향해 갑자기 꽥 소리를 지르며 대꾸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그새 화통 삶아 드셨소? 왜 이렇게 꽥꽥 소리를 지르고 야다이예요? 뭐니 뭐니 해도 내 집이 제일 편하고 좋습디다. 호호호…….“
" 그래? 그걸 이제야 알았어? 허허허 …….“
할머니가 갑자기 꽥 소리를 지르며 웃는 모습을 보자 그때야 할아버지는 안심이 된듯 덩달아 크게 소리내어 웃고 있었습니다.
”호호호…….“
할아버지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보자 할머니가 더욱 큰소리로 마주 보며 웃고 있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라도 된 듯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크게 웃는 소리가 오랜만에 집안 가득 울려퍼지고 있었습니다.( * )
-------- * ------------
* 상수리 : 참나뭇과에 속한 낙엽 교목. 5월에 꽃이 피고 공 모양의 열매는 이듬해 10월에 익는다. 열매는 묵을
만들기도 하고 떡을 만들기도 하며, 밥에 섞어 상수리밥을 지어 만들어 먹기도 한다.
또한, 열매를 삶은 물은 염색약으로 쓰이기도 하며 옛날에는 땔감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 도토리 ; 떡갈나무, 갈참나무, 물참나무, 졸참나무 따위의 열매를 통틀어 이르는 말. 주로 묵의 원료로 쓰인
다.